이기훈 연세대 교수 논문
“최남선의 동아일보 게재글
소년잡지의 상상력 더해져
위인ㆍ선구자 이야기 탄생”
조선시대 최고, 최대 지도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고산자 김정호가 조선 팔도를 돌아다녔고, 백두산 천지를 수 차례 답사했다는 얘기는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그렇다면 김정호 신화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계간지 역사비평 여름호에 실린 이기훈 연세대 국학연구원 HK교수의 글 ‘근대신화의 역설 – 고산자 김정호와 대동여지도의 경우’는 이 과정을 추적한 논문이다.
김정호의 생애는 거의 알려진 바 없다. ‘황해도 지역에 나서 서울에서 오래 활동한 인물로 보인다’는 정도다. 김정호는 “19세기 지도 제작과 출판을 전문으로 하는 연구자이자 출판가”에 가깝다. 지도 제작을 위해 측량 장비를 들고 전국을 다닌 사람이라기보다, 사무실에 앉아 기존 여러 지도들을 편집ㆍ제작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김정호가 영웅으로 재탄생하기까지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김정호를 다시 불러낸 이는 최남선(1890~1957)이다. 이미 19세기 중반부터 여러 기록에 김정호에 대한 평이 남아 있다. ‘지리학에 관심 있고 그림에 재주가 있어 지도를 참 잘 만든다’는 긍정적 평가다. 최남선은 1925년 동아일보에 실은 ‘고산자(古山子)를 회(懷)함’이란 글을 실어 기폭제 역할을 했다.
중인 출신이었던 최남선은 양반의 공리공담을 최대 적으로 간주했고, 과학기술을 무척 좋아했다. 금속활자를 열렬히 찬양했으며, 측량 작업에 기반한 지도 또한 극찬의 대상으로 삼았다.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조선 후기 문화의 축적된 결실이 아니라 소외된 학자의 시대를 앞선 업적”으로 만들만한 동기가 충분했다.
이 글 이후 소년잡지들이 김정호 신화에 살을 덧붙이기 시작한다. 1929년 방정환의 잡지 ‘어린이’에 실린 ‘고산자 김정호 선생 이야기’가 한 예다. 최남선의 ‘고산자를 회함’은 기본적으로 논설 형식의 글이라 사실관계가 그다지 많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다는 명목으로 소년잡지들이 그 빈 부분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었다.
김정호가 전국을 다 돌아다니고 백두산을 몇 차례 오르내리며 갖은 고생을 다한 끝에 기어코 완성해냈는데, 대원군이 김정호와 어린 딸을 죽이고, 대동여지도 목판본도 불태웠다는 가상의 이야기는 이 때 완성됐다. 다른 잡지 ‘학생’도 1929년 ‘북풍한설을 무릅쓰고 전국을 답사한 김정호’ 이야기를 널리 알렸다.
김정호 신화화는 일본 이노우 다다타카(1745~1818) 스토리를 기반으로 한다. 이노우는 젊어서는 근검절약으로 집안을 일으키고, 쉰 넘어서는 일본 전역을 측량해 지도를 만든 영웅이다. 이노우는 당시 일본 변경이었던 홋카이도를 본격 탐험한 사람이다. 이 점을 생각하지 않고 이노우 이야기를 빌려오다 보니 자연스레 김정호가 오지를 오간 것처럼, 당시 조선 반도가 사람이 살지 않거나 야만족이 사는 탐험과 모험의 땅인 것처럼 묘사하게 됐다. “민족주의의 신화가 민족적 자기부정의 논리가 되는 역설”이 탄생했다.
김정호 신화화는 광복 이후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사학자 이병도(1896~1989)가 이미 1969년에 김정호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모두 허구임을 밝힌 연구결과를 내놨으나, 과학기술과 국난극복 영웅 스토리에 목 메고 있던 당시 시대 분위기 속에서 묵살당했다.
지금이라고 다를까. ‘의지의 한국인’ ‘불굴의 한국인’ 얘기들이 넘쳐난다. 그래서 이기훈 교수의 지적은 따끔하다. “과학과 모험의 위인, 헌신하는 선구자는 민족주의자들이 지향하는 인간형이었다. 그러나 이는 제국주의 권력, 혹은 개발독재 권력이 요구하는 이상적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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