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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모진 비극 겪어낸 한국의 지성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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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모진 비극 겪어낸 한국의 지성 잠들다

입력
2016.01.16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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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으로 인한 남북 분단의 고통을 생 전체에 새긴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강의’, ‘담론’등 숱한 고전을 남기며 한국 사상사의 원류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냉전으로 인한 남북 분단의 고통을 생 전체에 새긴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강의’, ‘담론’등 숱한 고전을 남기며 한국 사상사의 원류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세모의 한파와 함께 다시 어둡고 엄혹한 곤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의 곤경이 비록 우리들이 이룩해 놓은 크고 작은 달성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하더라도, 다만 통절한 깨달음 하나만이라도 일으켜 세울 수 있기를 바랄 따름입니다.”(저서 ‘더불어 숲’에서)

15일 영면에 든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남과 북에서 각각 부풀려진 간첩단 사건으로 기약 없는 수형생활을 시작한 청년시절을 넘어, 한국 사상의 큰 줄기로 학계의 존경을 받았지만 늘 일각의 색깔론에 시달린 중년, 희귀암 진단으로 투병한 마지막 나날 등 질곡의 시절을 살아내면서도 늘 겸손함과 온기를 내뿜는 사상가였다.

한 청년의 삶을 모질게 휘감고 든 냉전

고인은 밀양군 교육감을 지낸 교사 출신 부친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며 집안 형편이 기울자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1959년 서울대 상대에 입학해 4ㆍ19, 5ㆍ16 등을 연이어 목도했고 61년부터는 독서서클을 만들어 후배들을 지도하는 등 학생운동에 몰두했다.

이때 인연으로 숙명여대 강사 시절 10여 차례 본 선배 김질락, 이진영과의 만남은 후에 통혁당 사건이 터지자 그가 ‘통혁당 핵심 성원’으로 몰리는 단초가 됐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야 구속 시점 이후 구성된 통혁당의 존재를 알았다는 고인은 생전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와의 인터뷰(정년퇴임 기념서 ‘신영복 함께 읽기’)에서 “(중앙정보부가 부풀린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김질락 등이 (성과를 부풀리기 위해) 북에 산하단체라 보고한 것 같다”고 회고했다. 북과의 관련성을 부풀린 양 집단의 저의로 별안간 ‘통혁당 지도간부’가 된 고인은 구타, 전기고문, 수 차례의 사형 구형 및 선고 끝에 무기수로 기약 없는 수형생활을 시작했다.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는 신영복(맨 왼쪽) 교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는 신영복(맨 왼쪽) 교수. 한국일보 자료사진.

자살 않은 건 신문지 한 장만한 햇볕 때문

고인은 자신의 20여 년의 수형생활을 ‘나의 대학 시절’ ‘사회학 교실’ ‘역사학 교실’, 최종적으로 ‘인간학 교실’이라고 했다. 교도소에서 만난 숱한 동료 재소자들의 삶과 언어가 “계급 성분을 뒤흔들었다”는 것이다. 또 책을 세 권 이상 소유할 수 없도록 한 당시 교도소 규정 탓에 오래 읽을 수 있는 ‘노자 도덕경’등 택한 일은 “서양적 존재론에 매여있던” 그의 사유를 확장했다. 출소 후 그가 여타 강의와 저서에서 줄곧 “존재론을 넘어서는 관계론”을 강조한 것은 이 때문이다.

“현실에 뿌리를 깊이 박지 못한 ‘창백한’ 관념을 반성”하기 시작한 고인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실린 엽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다. 매월 딱 한 번 필기구가 주어지는 엽서 작성 시간을 각별히 여겼던 그는 한 달 내내 거듭 가다듬은 문장들을 써 내려 어머니, 계수씨 등에게 부쳤다. 지인들은 징역의 비루함 대신 차분한 사유가 담긴 그의 글을 다소 신기하게 여겼다.

고인은 지난해 펴낸 ‘담론’에서 “가족들이 편지의 최종 독자였기 때문에 반듯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최소한의 의무였고, 그 편지가 검열을 거쳤기 때문에 국가권력이 편지를 검열하게 전에 자기검열을 통해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자존심”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숱한 재소자가 자살을 택했지만 “신문지 크기 만한 햇볕을 무릎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이 좋아 자살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적기도 했다.

따뜻하고 날카로운 통찰 ‘신영복 현상’ 불러

수인으로서의 고뇌가 응축된 이 육필 엽서를 나눠 갖던 지인 중 일부가 ‘평화신문’을 통해 이를 소개하며 존재가 알려진 엽서 속 글들은 독자들의 열렬한 요청 속에 출판작업이 진행됐고, 그가 출소하던 1988년 여름 함께 세상에 나왔다. 93년에는 육필 엽서 원본을 묶은 영인본 ‘엽서’가 출간된 이 사색들은 뭉클한 감동을 남기며 시대의 고전으로 찬사 받았다. 출소 이듬해 성공회대 강단에 선 그는 경제학 강의뿐 아니라 ‘사상사’강의를 자처했고 20여 년간 벼린 동양고전에 대한 이해를 풀어냈다. 동서고금의 지식, 겸손하되 날카로운 사색을 담은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강의’ 등의 저서는 출간될 때 마다 압도적 호응 속에 ‘신영복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글을 읽는 것은 따뜻하되 날카로운 통찰에 탄복하는 과정인 동시에, 오지 않은 미래를 절감하는 노동이었기에 독자들이 애틋한 심정으로 그의 글을 고전의 반열에 올린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자신이 만난 사람 모두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인간적으로 대하는 지식인을 이제까지 보지 못했다”는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고인의 정년퇴임을 앞두고 쓴 글에서 “선생의 사상을 일관하는 저류는 인간해방”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선생의 사상을 받치는 두 지반은 마르크스 정치경제학과 관계론의 인간 철학”이라며 “마르크스의 경직성을 넘어서며 동시에 과학적 분석을 강조하는 점에서 우리 진보주의의 새로운 지평”이라고 썼다.

신영복 교수가 2006년 성공회대 대학성당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신영복 교수가 2006년 성공회대 대학성당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신영복체’도 유명…사람에게서 희망 찾자

학자로서뿐만 아니라 ‘신영복체’ ‘어깨동무체’ 등 선이 굵고 단정한 글씨체를 선보이며 서예가로도 활약한 고인의 ‘처음처럼’은 소주 브랜드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서화 에세이 ‘처음처럼’의 개정판 출간을 준비 중인 돌베개 출판사의 이경아 편집주간은 “최근까지도 개정판 원고를 하나 하나 손수 들여다 보던 선생의 갑작스러운 소식에 황망할 따름”이라며 “지난해 ‘담론’ 서문에 ‘모든 텍스트는 언제나 다시 읽히는 것이 옳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하는 것’이라고 쓰셨기에 마음이 아팠는데 돌이켜보면 이 때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신 게 아닌가 싶다”며 안타까워했다.

첫 서예전에서 공개한 신영복 교수의 작품. 돌베개 제공
첫 서예전에서 공개한 신영복 교수의 작품. 돌베개 제공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생의 전체에 고스란히 새긴 고인은 마지막 강연에서까지 원망, 비관, 비난 대신 낙관과 희망을 말해 좌중을 숙연하게 했다.

“사람을 거름하기는커녕 도리어 ‘사람으로’ 거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절망과 역경을 ‘사람’을 키워 내는 것으로 극복하는 것, 이것이 석과불식(碩果不食ㆍ씨과일은 먹지 않고 땅에 심는다)의 교훈입니다. 욕망과 소유의 거품, 성장에 대한 환상을 청산하고 우리의 삶을 그 근본에서 지탱하는 정치, 경제, 문화의 뼈대를 튼튼히 하고, 사람을 키우는 일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이고 희망의 언어입니다.”

특히 좋아한 글귀는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이다. 마지막 강연의 말미에서 그는 말했다 “우리가 흘려 보낸 수 많은 언약들이 언젠가는 여러분의 삶의 길목에서 꽃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김혜영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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