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측면판 등 일부만 보여줘
왕 목관엔 마구리 장식 있어 차이
왕비 금동신발 원형 가깝게 복원
1,500년 된 백제 무령왕릉의 신비가 한 꺼풀 또 벗겨졌다.
국립공주박물관은 24일 기존 ‘무령왕릉실’을 ‘웅진백제실’로 개편하면서 최근 복원된 무령왕(재위 501~523)과 왕비의 실제 목관을 1971년 무령왕릉 발굴 46년 만에 최초로 공개했다. 두 목관은 그동안 측면판 등 일부만 세상에 보여줬을 뿐 실물이 그대로 드러난 적은 없다. 목관의 복원과 전시로 무령왕과 왕비의 관도 46년 만에 다시 나란히 놓이게 됐다. 출토 이후 복원 전까지 목관은 수장고에 보관돼 왔다.
그동안 일반에 공개돼 온 왕과 왕비의 목관은 원형을 추정해 만든 복제품이었다. 국립공주박물관에 따르면 2004년 박물관이 현재 위치에 신축돼 이전하면서부터 두 목관의 실물을 복원키 위한 준비가 시작됐다. 10여 년 동안 연구와 보존처리를 지속한 끝에 현재 남아 있는 모든 판재와 부속품의 위치를 찾아 목관의 원상을 복원했다.
백제 제25대 왕인 무령왕은 고구려에 한강 유역을 빼앗겨 혼란에 빠졌던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전쟁으로 고구려와 세력균형을 이루고 가야 지역으로 진출했다. 무령왕의 관은 그 명성만큼이나 웅장함이 느껴진다. 나무로 만들어진 많은 부분이 썩어 잔존율이 높지 않지만, 삼국시대 목관 중에서는 형태가 상당히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무령왕 부부의 목관은 일본 규슈(九州)지방의 금송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금송은 목질이 단단하고 습기에 강해 훌륭한 관재로 여겨졌고 일본에서도 지배계층만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이번 복원은 목관의 앞, 옆면을 모두 맞췄다는 데 의의가 있다. 배영일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기존에는 나무 판에서 떨어져 나온 관 고리와 관 못이 누구의 관에 속한 것인지도 불명확했다”며 “출토 당시 사진 등을 보고 부속품을 연결했고, 왕과 왕비 관의 차이점도 밝혀냈다”고 설명했다. 두 목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마구리 장식의 유무다. 왕비의 관은 은장만으로 장식 돼 있지만 왕은 이보다 화려한 마구리 장식이 있었다. 또 기존에 한 판의 목재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던 관의 각 면은 두 개의 나무판이 위아래로 결구 돼 있는 형태라는 점도 확인됐다. 두 나무판은 못이 아닌 나무 쐐기로 연결돼 있다. 배 실장은 “목재인 유물을 잘못 다루다 훼손될까 봐 보존과학과 결부해 차근히 보존처리를 해 왔다”며 “벗겨진 옻칠을 안정화하고 각 판의 위치를 정확히 맞춰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말했다.
발굴 당시 고고학계를 놀라게 했던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왕릉 중 유일하게 도굴되지 않은 능이다. 무덤에서 출토된 2,900여점이 넘는 유물은 백제의 화려하고 섬세한 문화를 대변한다. 새로 단장한 웅진백제실에서는 이중 980여점의 유물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전시실 3부 ‘무령왕의 생애와 업적’은 무령왕릉 내부 바닥과 똑같은 크기의 진열장을 설치하고, 능의 널길과 널방에 놓였던 석수와 제사용 그릇, 목관 등을 실제 출토 위치를 반영해 배치했다. 실제 무덤 입구에 위치한 지석으로 전시가 시작 돼 마치 무령왕릉 내부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국보 제164호, 제165호로 지정된 왕비의 베개와 발 받침도 채색안료의 안정화 처리와 금박의 위치복원 등을 마치고 일반에 공개됐다. 기존에 유물의 3분의 2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던 왕비의 금동신발도 원형에 가깝게 복원됐다. 박물관 측은 “무령왕릉 잔존물 중 그 파편을 새롭게 찾아 뒤꿈치 쪽을 복원했다”며 “왕의 베개와 발 받침은 아직 보존처리가 더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공주=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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