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현대 미술을 모른다. 진중권씨 등이 최근의 조영남씨 대작 사건을 두고 “니들이 무식해서 그러는데 원래 현대 미술에서 창작자는 생각만 하고, 조수들이 죄다 만드는 거야”라고 할 때 ‘열자’(列子)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세상의 능력 있는 자들이 능력 없는 자들을 속이는 게 조삼모사(朝三暮四)와 같다.”
예술을 그토록 잘 아는 능력자라면 그동안 조영남씨의 그림 같은 것은 “생각하는 사람이 주인이고 그에 따르는 노동은 조수들이 하는 것뿐”이라고 왜 이야기해주지 않았나. 앤디 워홀을 비롯한 현대 미술가들이 그들의 손이나 발로 작품을 만든 게 아니라 주둥아리로 만들었다고 왜 진작 떠들어대지 않았나.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을 들여 작품을 사 간 현대 미술 소비자들은 결국 작가의 사인 값으로 돈을 지불한 셈이다.
나는 글을 쓰면서 가끔 ‘그분’이 오시는 걸 경험한다. 그분이란 영감일 수도 있고 뮤즈일 수도 있고 기발한 아이디어일 수도 있다. 이때 나는 미친 듯이 자판을 두드려 댄다. 이 순간을 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수억원의 돈도, 명예도, 그 어떤 쾌락도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이 찰나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마다할 수 있다.(그래서 내가 돈이 없다)
“누구에게나 한 번쯤 내 운명은 내가 주인인 듯한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의 기분은 마냥 고양되고, 행복함을 맛볼 수 있다. 이런 경험은 우리의 뇌리에 오랫동안 남아있게 되고, 더 나아가서 본인이 지향하고 싶은 삶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캔버스 위의 여러 색이 마치 자석의 힘에 이끌리듯 서로서로 뭉치면서 생명력을 갖는 형태를 만들어 갈 때 이를 창조한 화가가 느끼는 것도 이와 같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위와 같은 경험을 최적 경험(Optimal experience)이라 했다. 외부 여건이 좋거나 나쁘거나 상관없이, 우리가 가치 있는 일을 이루기 위해 몸과 마음을 최대한으로 밀어붙일 때만 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모든 날은 인생이다’(강신재)라는 책에는 80대 구두 수선공 양근수씨 이야기가 나온다. 수제화 전성기가 오래 전에 끝났으나 그는 여전히 새벽 5시부터 저녁 7시까지 구두를 만든다. 구두 한 켤레를 위해 100번의 바느질과 300번의 망치질을 한다. 여섯 명의 자식들이 번듯하게 자랐고 먹고살 만한데도 그는 주문받지도 않은 구두를 만든다. 왜? 자신의 구상이 실현되는 예술적 노동과 그에 따르는 순수한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을 모으고 구부러진 등을 더 구부릴 때, 정신과 육신을 극한까지 내몰았을 때 그는 행복하다. 이때 양씨가 느끼는 것이 바로 최적 경험이리라.
최적 경험은 예술을 주관하는 신이 내려주는 선물이다. 이 선물을 받지 못한 자들은 노동을 거부한다. 앤디 워홀이 통조림 캔 판화를 “이번에는 100개만 찍어서 졸부들한테 백만달러씩 받자”라는 한 마디 말로 만들어 냈을 때, 뮤즈는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경북 상주의 허름한 구둣방에서 제화공이 느꼈을 법한 창작의 환희 같은 것을 앤디 워홀은 느낄 새가 없었다. 밀려들어 오는 돈을 어디에 써야 할지 고민하기도 바빠서.
회화가 되었든, 조각이 되었든, 원시-현대 미술이 되었든 뮤즈 여신은 인간이 오직 근육을 움직여 작품을 만들 때만 창작의 기쁨을 준다. 예술가가 명예나 돈처럼 다른 것으로 받고자 한다면 그에게 순수한 즐거움은 주지 않는다. 명예나 돈은 다른 신의 영역이기에 예술의 신인 그녀가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다. 조영남씨는 조수 화가 송모씨에게 창조의 열락은 모두 주고 자신은 오직 사인하는 순간의 기쁨만 누린 셈이다. 그래서 나는 조영남씨가 불쌍하다.
명로진 인디라이터 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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