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 조사 진행 중 崔 국정농단 공판
300m 거리 두고 피의자 피고인 돼
단순한 ‘말벗’ 아닌 동반자 관계
朴, 비선 감싸다 국가 혼란 이끌어
40년 지기의 비참한 하루였다. 21일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61ㆍ구속기소)씨가 각각 검찰청과 법원에 섰다. 최고 권력자와 비선실세의 위치가 아니라 국정농단 사건의 피의자와 피고인 신분이었다. 두 사람의 오래고 질긴 인연은 헌정질서 파괴와 국가적 분열이라는 결과만을 낳은 채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고 있다.
이날 오후 2시 박 전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 1001호실에서 한창 오후 조사를 받고 있을 때쯤, 동쪽으로 불과 300m 떨어진 서울중앙지법 417호실에선 최씨가 흰 수의를 입고 법정에 모습을 나타냈다. 국정농단 사태와 관련한 22번째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최씨는 애써 태연한 척 했다. 가끔 물을 들이키거나 변호인과 귓속말을 주고 받는 정도였다. 평소와 달리 공중에 시선을 둔 채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도 포착됐지만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진 않았다. 이날 최씨 측 변호인은 “최씨가 박 전 대통령 검찰 소환조사 소식을 뉴스를 봐서 알고 있다”며 “힘들어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씨는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이 결정된 지난 10일 법정에선 태연한 모습이었지만 구치감에서 홀로 눈물을 쏟았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3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9년 6월10일 한양대에서 열린 전국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 주재 ‘새마음제전’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은 당시 퍼스트 레이디로 새마음봉사단 총재였고, 최씨는 전국새마음대학생총연합회장이었다. 언론에 공개된 당시 영상에는 박 전 대통령 곁에서 밝게 웃으며, 한시도 눈길을 떼지 않는 최씨의 앳된 모습이 담겨 있다. ‘잘못된 만남’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과 최씨 일가와의 인연은 그보다 수 년 정도 앞섰던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통령은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서거(74년)한 뒤인 75년 3월 최씨의 아버지 최태민과 청와대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과 최씨의 인연이 이즈음부터 시작됐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박 전 대통령이 칩거에 들어가면서 두 사람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최씨가 독일 유학을 떠났다가 귀국한 85년 둘은 재회했고, 최씨가 박 전 대통령을 ‘언니’라고 부르는 사이가 됐다. 이성한 전 미르재단 사무총장은 지난해 한 언론 인터뷰에서 “최씨가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스스럼없이 ‘언니’라고 불렀다”고 주장했다. 2006년 박 전 대통령이 지방선거 유세 때 ‘커터칼 테러’를 당했을 때도 최씨가 병원이나 삼성동 자택을 드나들며 필요한 일을 처리해줬다는 얘기도 나왔다.
최씨는 박 전 대통령의 단순한 ‘말벗’이 아니었다. 박 전 대통령이 83년 1월 육영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후 최씨는 박 전 대통령과 관련된 일을 도맡아 사업이나 실무를 관장했다. 86년 육영재단 부설 유치원을 서울 강남에 개설했고, 박 전 대통령이 이사장을 맡은 ‘한국문화재단’의 부설연구원 부원장을 맡아 출판이나 장학사업 등의 실무를 맡았다. ‘여성중앙’ 87년 10월호는 “최태민의 다섯번째 딸 최순실이 박근혜와의 친분을 과시하고 전횡을 일삼아 문제가 됐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최씨는 박 전 대통령이 정치에 입문한 1998년 4월 대구 달성 보궐선거 이후 모습을 감췄지만 남편 정윤회씨를 박 전 대통령 보좌관으로 두며 본격적으로 비선권력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문고리 3인방으로 대표되는 보좌진도 직접 꾸린 것으로 알려졌다.
2012년 12월 19일. 박 전 대통령은 자신이 제18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날 최씨에 대한 의존과 질긴 인연을 잠시라도 끊었어야 했다. 취임 2년째인 2014년 정윤회 문건 유출사건이 터졌을 때 박 전 대통령은 사안의 폭발성을 인식하고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계속 비선을 감싸 안은 무신경과 무지, 무책임의 대가는 참담했다. 헌정 사상 첫 탄핵 대통령이라는 개인의 오명뿐 아니라, 장기간 국가적 혼란을 야기하는 유례없는 결과를 낳았다.
김현빈 기자 hb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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