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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남매 엄마 검사장’의 24년 분투기 “검찰 양성평등 의식 조금씩 바뀌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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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남매 엄마 검사장’의 24년 분투기 “검찰 양성평등 의식 조금씩 바뀌었죠”

입력
2017.09.1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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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임신 때 사표 고민… 많은 분이 도와줘

여검사 지도할 때 조심하는 선배들 아쉬워

시대가 변해도 일ㆍ가정 양립 고민은 여전

‘제2호 여성 검사장’ 이영주 춘천지검장이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의 마스코트인 ‘수호랑’ 배지를 옷에 달고 강원도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그는 “제 두 번째 부임지가 춘천지검 강릉지청이고, 2년 전에는 이 곳 춘천지검에서 차장검사로 근무했다”고 말했다. 박지연 기자
‘제2호 여성 검사장’ 이영주 춘천지검장이 2018 평창 동계 올림픽의 마스코트인 ‘수호랑’ 배지를 옷에 달고 강원도에 대한 애착을 드러냈다. 그는 “제 두 번째 부임지가 춘천지검 강릉지청이고, 2년 전에는 이 곳 춘천지검에서 차장검사로 근무했다”고 말했다. 박지연 기자

“검사장이 되기까지 수백 명의 도움과 희생이 따랐습니다.”

‘다둥이 엄마’ 이영주(50ㆍ사법연수원 22기) 춘천지검장은 “24년 간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었던 건 모두 가족과 동료들의 도움 덕분”이라고 했다. 양성평등 시대라고는 하지만 엘리트들이 모인 법조계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이 엄마로서, 직장인으로서 일하기가 다른 어떤 직역보다도 힘겹기 때문이다. 검찰 역사상 두 번째 여성 검사장 타이틀을 단 그를 지난달 31일 춘천지검 청사에서 직접 만났다. 그의 옷깃에는 평창 동계 올림픽 마스코트인 ‘수호랑’ 배지가 달려 있었다. 이 지검장은 “제 두 번째 부임지가 춘천지검 강릉지청이고, 2년 전에는 이 곳 춘천지검에서 차장검사로 근무했다”며 “함께 일했던 직원들이 남아 계셔서 강원도가 더 친근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 지검장의 ‘네 자녀 출산ㆍ육아기’에는 검찰 조직의 성(性) 의식 변천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가 장남을 출산한 1993년엔 출산휴가가 당연한 권리로 인식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 지검장은 당시 법정 휴가기간인 두 달을 채우지 못하고 업무에 복귀했다. 업무가 많은 연말이었기 때문이다. 기력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피의자 조사를 마치고 나니 2주간 목이 잠겨 바람소리만 새어 나왔다고 했다.

청사 내 여자화장실조차 없던 시절이었으니 출산휴가는 개념 자체가 낯선 시기였다. 이 지검장은 “두 번째 부임지인 강릉지청에 근무할 때 여자화장실이 없어서 유일한 남녀 공용 화장실인 지청장 화장실을 썼다. 제가 좀 둔한 편인데 나중에는 지청장이 불편할 것 같아 화장실을 자주 안 갔다”면서 웃었다. 이후 검찰 문화가 조금씩 바뀌어 1995년 둘째, 2003년 셋째를 출산할 때는 출산휴가를 모두 소진했다. 2006년 넷째 출산 때는 3개월 출산휴가에 8개월 육아휴직까지 썼다.

이영주 춘천지검장은 “제가 천주교 신자인지, 대를 이을 자식이 필요했는지를 많이 물어본다”며 “종교는 없고 아들-딸-딸-아들 순이라 특별히 아들을 낳으려고 한 건 아니다”고 웃었다.
이영주 춘천지검장은 “제가 천주교 신자인지, 대를 이을 자식이 필요했는지를 많이 물어본다”며 “종교는 없고 아들-딸-딸-아들 순이라 특별히 아들을 낳으려고 한 건 아니다”고 웃었다.

법무부 여성정책담당관 시절 넷째를 가졌을 때는 이 지검장도 진로를 고민했다. 간부 회식에서 이 지검장이 “술을 안 마시겠다”고 하자, “넷째 가진 거 아냐” “에이 말도 안 돼”하는 주변의 농담 섞인 반응을 보고 민망해서 조용히 사표를 낼 계획이었다. 그러자 친정 아버지가 말렸다. “네가 검사라는 사실이 자랑스럽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것. 남편인 임정수 변호사도 인생 후반기를 변호사로서 의미 있게 보내고 싶다며 판사 직을 그만뒀다. 인사로 서울동부지검으로 옮긴 뒤에는 선우영 당시 동부지검장이 “나도 넷째로 태어났다”며 육아휴직을 격려했고, 동료들도 “출산은 국가가 장려하는 일”이라고 응원했다. 이 지검장은 “마흔 살에 늦둥이를 가지니 힘이 들고 해서 용기를 내 육아휴직을 했다”며 “남성 동료들이 만삭의 버거움을 이해하기 힘들 텐데 저를 대신해 24시간 당직을 서줬다. 네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적어도 수백 명이 도와줬을 것”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둘째(22)가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막내 동생의 학교 앞 교통정리를 돕는 등 육아에 동참하고 있다.

이 지검장이 24년 검사생활 동안 거리감을 느낀 ‘남성 중심 문화’는 거친 음주문화나 성차별적 언행이 아니었다. 오히려 “선배들이 소수인 여성 후배를 대하기 어려워해서 필요한 지도(指導)를 생략한 일”을 꼽았다. 이 지검장은 “남자 후배라면 쉽게 짚고 넘어갔을 일을 여자 후배에게 말하면 ‘울 까봐’ 또는 ‘이성을 대하는 게 불편해서 조심하느라’ 안 하는 경우가 있다”며 “허심탄회하게 지도해주면 고칠 텐데 말을 제대로 해주지 않아 실수를 거듭한 일도 있다”고 말했다. 검찰 간부가 된 이 지검장은 차장ㆍ부장검사들에게 “후배 여검사들을 지도하는 데 있어서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르쳐주되, 사심 없이 후배를 이끌어주는 마음으로 지도하라”고 당부한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여검사들이 가장 많이 토로하는 고민은 여전히 일과 가정의 양립 문제다. 이 지검장은 “법무연수원에서 신임검사를 대상으로 강의하는데 미혼인 한 여검사가 지방근무가 잦아 부모님께 불효하는 것 같다고 눈물을 보이더라”며 “대한민국 검사가 된 걸로 효도를 했으니 이제 훌륭한 검사가 되도록 열심히 일하라고 격려했던 적이 있다”고 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이 지검장의 모친이 지금도 ‘딸이 공부를 잘 했고 검사가 돼 기뻤던’ 사실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한다는 이야기를 함께 전했다. 그는 출산ㆍ육아와 더불어 예측이 불가능한 인사와 잦은 근무지 변경으로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말했다. 검찰 내에서 문제의식을 갖고 있고 개선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지검장은 우선 “모든 걸 다 잘해야 한다는 완벽주의를 버리라”고 했다. 이 지검장은 “젊었을 땐 주말에 청소하고 와이셔츠 다리며 가사에 많은 시간을 쏟았는데 이젠 집 꾸미는 걸 아예 포기하고 옷은 세탁소에 맡긴다”며 “대신 애들과 장난치고 뒹굴면서 이야기하고 쉬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여성 검찰총장이 언제쯤 나올 것인지를 묻자 “중견 여성검사가 많지 않아 한동안 기다려야 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여성 검찰총장 배출도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부장검사 급부터 검찰 내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야 한다”고 말했다.

◆이영주 춘천지검장 프로필

▦1967년생 ▦서울혜화여고, 서울대 법대 ▦사법연수원 22기 ▦서울남부지검 검사, 강릉지청 검사, 전주지검 검사, 법무부 여성정책담당관, 대검 형사2과장, 서울동부지검 형사2부장, 수원지검 형사1부장, 춘천지검 차장검사, 부천지청 차장검사, 법무연수원 용인분원장, 춘천지검장

춘천=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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