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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광화문과 여의도 사이

입력
2016.12.1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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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빌 클린턴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이 한국에서 벌어졌다면 당연 탄핵감이다. 도덕성이 훼손된 대통령의 말, 정책에 힘이 실릴 리가 없다. 그런데도 클린턴은 경제를 챙기고 국정에 매진하며 한편으로 스스로 몸을 낮춰 고해했다. 돌아선 여론은 국정에 헌신한 대통령을 신뢰하며 재선시켰고, 클린턴은 물러나서도 16년 넘게 정치적 지분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에 도덕적이던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는 언제나 정책의 정당성 논쟁을 피하지 않았다. 20세기 최연소 총리인 그가 보기에 공정하지 않은 언론, 정치권 탓이기도 했지만 시끄럽고 짜증나는 정치는 그를 국민에게서 멀어지게 했고, 퇴임 뒤 여론은 그를 재기불능으로 만들었다. 신념을 밀어붙이는 것도 지도자의 덕목이지만, 국민 요구를 살핀 지도자가 결국 승리한 것이다.

돌이켜 보면, 박근혜 대통령은 클린턴의 스캔들에 블레어 식으로 대응했다. 최순실 게이트에 박근혜 식 불통으로 대응했으니 국회의 탄핵 가결을 초래한 것은 불가피 수순이었다. 사건의 끝을 지켜봐야겠지만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길도 그랬다. 진실보다 책략을 앞세운 닉슨은 워터게이트 스캔들에 거짓말까지 보태 국민을 분노시켰고, 탄핵 위기에 몰리자 사임했다. 박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 가결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두 달이 되지 않는다. 박 대통령이 지난 10월 24일 국회에서 개헌 추진을 발표하고, 그날 밤 최순실의 국정개입이 문건으로 확인된 때부터 따져 48일 만이다. 이 짧은 시간에 광장으로 나온 시민들이 세상을 바꾼 데에는 이런 박 대통령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이 무엇보다 컸다. 탄핵 이후에도 대통령이 헌법재판소 심판 전에 사퇴하거나, 헌재가 탄핵을 인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69%와, 83%로 높을 만큼 분노는 식지 않고 있다.

이런 분노 앞에 탄핵안이 부결됐다면 주말에 열리던 촛불집회는 매일 열리고, 성난 촛불은 국회와 청와대 점령에 나섰을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광장 민주주의가 의회 민주주의를 대체하려는 시도가 뚜렷해졌을 것이다. 새누리당 비박계의 탄핵 찬성 이유 중 하나는 반대하면 국회가 탄핵된다는 두려움이었다. 탄핵이 박 대통령에 대한 징계이면서도, 예고된 국정혼란을 최소화할 길이었던 셈이다. 더구나 광장의 정치, 거리의 정치가 분노와 함께 보여준 역설적인 희망은 ‘박정희’를 뛰어 넘은 점이다.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든 데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부채감이 작용했다. 이만큼 잘 살게 해준 박 대통령의 딸이고, 부모도 없는 불쌍한 사람이고, 거기에 혼자이니 친인척 비리는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작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탄핵 가결은 산업화, 개발, 독재의 세례를 걷어치우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2004년과 2008년, 그리고 이번 2016년에도 촛불은 무엇을 지향하기 보다는 무엇에 반대하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번 11월 항쟁은 적극적으로 ‘저스트 코리아’(공정한 한국)를 만드는 힘이 되길 기대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2011년 5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인디그나도스’(분노하라) 시위는 이후 새로운 정치세력 ‘포데모스’(우리는 할 수 있다)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대통령을 무릎 꿇린 분노 한 구석에는 청산해야 할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뒷모습이 담겨 있다. ‘이재명 현상’으로 불리는 이재명 성남시장의 지지율 상승은 처음부터 하야와 탄핵이란 선명성 높은 주장을 하면서 이런 여론에 올라탄 측면이 크다. 일부 언론에서 대선 잠룡으로 인정도 하지 않는 사이 그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지지도를 추월했다. 하지만 지금은 홀연히 나타나 분노를 풀어줄 영웅이나 대선주자가 나올 시대나 정치적 상황은 아니다. 그렇다고 광장의 함성을 정치가 풀어내기도 어려워, 이재명 현상은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는 여건이다. 탄해 가결 뒤 서울 광화문 광장과 여의도 국회 사이에 긴장감이 감도는 연유다.

이태규 정치부장 tg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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