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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내가 만일 재벌3세라면…

입력
2016.12.2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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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6일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게이트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재벌 총수들. 오대근기자
이달 6일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게이트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재벌 총수들. 오대근기자

내가 만일 재벌3세라면, 전 국민의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할 자신이 있는데, 애석하게도 민초의 딸로 태어나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 기업의 성공은 국가 정책과 국민 성원에 힘입은 바 큽니다. 우리는 보다 많은 세금을 납부함으로써 공동체에 보답할 의무가 있습니다.” “기업의 발전은 노동자의 행복과 창의성에 달려 있는 바, 전격적으로 주4.5일제를 도입하고, 빠른 시일 내에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습니다.” “단지 재벌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제 아이들이 보통사람의 아름다운 삶으로부터 배제되고 격리되길 원치 않습니다. 저는 아이들의 보통사람 될 권리를 위해 반드시 공립학교에서 교육시킬 것입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벌써 들려오는 듯하다. 무슨 포퓰리스트 씨나락 까먹는 소리냐는 힐난도 물론 들린다.

최순실게이트 국정조사 청문회에 나란히 불려 나온 재벌 2, 3세들의 맨 얼굴을 보면서 왜 한국 재벌들은 이토록 획일적일까 새삼 궁금해졌다. 유전자의 랜덤 원리에 따라 어느 집단에나 예외적 괴짜들이 존재하게 마련인데, 돈 대신 생의 다른 보람을 찾겠다는 혈기방장한 탈주가 왜 이 그룹에서는 거의 이뤄지지 않는 것일까. 어쩌면 한번도 칭찬을 못 받아 봐서일 수도 있겠다. 어차피 반기업 정서가 만연한 곳, 가던 길이나 가자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실한 칭송의 쾌락은 이들의 내면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순진한 의문이 들면서, 재벌3세 주인공의 통속드라마가 절로 써지고 말았다.

온갖 사회병리와 병폐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의 건강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때는 그들의 공동체의식을 목도할 때다. 거부들의 재산 기부가 매우 자연스러운 이 사회는 ‘나의 성공이 나의 힘만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을 꽤 많은 구성원들이 체감하고 있는 듯 보인다. 미국 사회가 부시 대통령의 상속세 폐지 공약으로 10년 가까이 씨름하는 동안 전 세계가 신선하게 목격했던 억만장자들의 집단반대가 대표적이다. “우리의 세금을 절대 깎지 말라”던 이들의 명단에는 워런 버핏과 조지 소로스를 위시해 빌 게이츠의 부친, 록펠러의 후손, 월트 디즈니의 종손녀 등 수퍼리치들이 즐비했다.

이 중 디즈니 상속녀이자 영화감독인 애비게일 디즈니가 2010년 USA투데이에 쓴 기고문을 잊지 못한다. ‘미키 마우스, 상속세와 나’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왜 자신이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지 끝도 없이 열거하는데, 구구절절 심금을 울렸다. “1928년 미키 마우스라는 역사적 캐릭터를 뺏길 뻔했을 때 이를 막아준 것이 미국의 저작권보호법이었으며, 집집마다 방안에서 디즈니 텔레비전 시리즈를 방영할 수 있도록 채널을 허가해준 게 연방통신위원회였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지어진 연방 고속도로와 교통 체계가 아니었다면 수백 만 명의 방문객이 디즈니랜드를 찾아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국가가 구축한 사회기반시설과 법령, 조세제도 덕분에 디즈니가 성공할 수 있었다며 부자 증세를 소리 높여 외치는 모습을 보고, 돈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그저 탄복했다. 기업 이미지와 브랜드 가치 제고에 이보다 효과적인 홍보 수단을 본 적이 없다.

나의 성공은 오로지 내가 잘난 덕이므로 그 과실 역시 나 혼자 독식하는 게 지당하다는 인식이 한국사회에는 팽배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올 상반기에도 국세 체납이 가장 많이 발생한 세무서 열 곳 중 다섯 곳이 서울 서초ㆍ강남이었다. 나머지도 종로구, 용인시 등 부촌 일색이다. 해가 바뀌면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희망을, 닥쳐올 환멸을 두려워하면서도, 애써 억누르기 힘든 시국. 오랜 국가혐오를 청산하고자 공동체로부터 내가 입은 수혜를 떠올려본다. 공교육 시스템 덕분에 문맹이 되지 않았고, 공공 보육체계와 교통ㆍ인터넷망 덕분에 아이들 떼놓고 나와 기사 쓰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쳐 먹는 새해 결심. 급여의 2%를 내고 있는 자선 기부금을 내년에도 아까워 말고 계속 낸다. 재벌3세라도 된 기분으로.

박선영 문화부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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