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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강물은 언제 흘러가나

입력
2016.12.2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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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 끝나고 새벽에 들어오는 아이의 / 추운 발소리를 듣는 애비는 잠결에 / 귀로 운다”(김주대, ‘부녀’ 전문) 이 짧은 시가 강렬하게, 그리고 아프게 환기하는 현실의 한 장면에서 시인이 말하지 않고 있는 몸의 기관은 눈과 목울대다. 눈은 젖고 목으로는 무언가가 솟구치지만 눌러야 한다. 사실은 아이의 발소리도 그다지 크게 들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새벽 냉기를 떠올리는 아비의 마음속에서 그 소리는 증폭되었으리라. 그렇다면 정작 시의 언어로 발화되지 않은 것은 어떤 행동일진데, 우리는 그 무력함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된다.

광장의 촛불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특별한 연말이지만, 다들 당장의 생활전선에서야 하루하루의 고단함을 감내해야 할 거고 궁벽하고 외진 자리들의 막막함은 또 그대로 남아 있을 테다.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정색하고 따지기에도 남세스러운 범죄 집단과 그 방조 세력이 국가 시스템의 중심부에서 이 정도로 활개 치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분노한 민의에 의해 뒤늦게나마 그 무리에 대한 퇴출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문제는 이들이 사익을 챙기며 국가 시스템을 유린하는 사이 더 악화한 영역은 그것대로 바로잡으면서, 불공정과 불평등을 구조화하며 점점 더 승자 독식의 세계로 치닫는 사회 전반을 근본적으로 점검하고 바꾸어나가는 일일 텐데 쉽지 않은 과제임은 분명하다. 아르바이트 끝나고 새벽에 들어오는 아이가 있을 수도 있다. 아이의 추운 발소리에 귀로 우는 아비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런 안쓰러움이 없는 세상이 어디 있으랴. 다만 내일에 대한 기대를 아예 내려놓게 만드는 세상, 그 기대를 서로 접게 만드는 세상은 이제 멈추어야 한다.

부산의 한 대학에서 마련한 출판 편집자 취업 특강에 다녀왔다. 방학을 이용해 모두 8회의 프로그램으로 준비된 것인데 신청 학생들이 예상 인원을 많이 넘어섰고 경상계 이공계 학생들도 꽤 신청했다는 전언이다. 학생들의 취업에 무슨 실질적 도움을 줄 처지는 아니지만, 편집자로 일해온 이력으로 몇 마디 말 정도는 보탤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학생들은 진지하게 들어줬고 이런저런 질문도 있었다. 그런데 내려가는 열차 안에서 강의 내용을 간추리면서도 결국 막혔던 대목이지만, 문제는 말 그대로 취업이 아닌가. ‘해방 후 출판계의 최악의 불황’은 아무도 웃지 않는 농담이 된 지 오랜데, 매체 환경의 급격한 변화 등을 감안할 때 적어도 지금은 규모나 양적 성장에서 변곡점을 지났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변화하는 세상에 맞춰 출판의 개념과 영역을 새로이 만들어가려는 다양한 노력이 있고, ‘독립출판’과 ‘독립서점’처럼 새로운 출판 생태계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흐름들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더라도 출판계가 열어줄 수 있는 진입의 문이 그다지 밝지도 많지도 않다는 게 냉정한 평가일 테다. 더구나 다른 부문도 그렇겠지만 지방은 그 자체로 큰 핸디캡이다. 느슨한 시절에 출판계에 들어와 지금까지 운 좋게 밥을 벌어온 선배 편집자로서는 젊은 학생들을 마주한 두 시간이 정말 고역이었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그러거나 세상은 흘러가고 움직인다. 올해 촛불 광장에서는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유독 많이 눈에 띄었다. 다들 밝고 힘찬 모습이었다. 백무산 시인은 “강물은 어떤 경우에만 흘러서 간다”고 하면서 그 흐름을 가능하게 하는 ‘축(軸)’을 생각한다. “강은 하구의 뿌리에서 상류의 가지와 잎새까지 / 역류하는 힘이 강의 뒤쪽에 있다 / 역류하는 탄생의 힘은 어둠속에 있다”(‘축을 생각한다’) 이 쉽지 않은 시적 발견 안에서 끌어올리고 흘러가게 하는 힘의 축은 거스르는 데 있다. “흐릿하고 지리멸렬하고 누락되고 / 배제되고 재갈 물린 것들이……” 말이다. 다시 새해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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