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지현 기자

등록 : 2016.12.30 17:00
수정 : 2017.01.01 15:34

예민? 까칠? '프로불편러'가 세상을 바꾼다

[사소한소다] <19> 소수의 목소리

등록 : 2016.12.30 17:00
수정 : 2017.01.01 15:34

“언니, 이거 나만 불편해?”

지난 7월 케이블TV JTBC의 예능프로그램 ‘아는 형님’에 출연한 김희철이 가수 서인영에게 던진 말이다.당시 그는 이 말 때문에 ‘여성혐오’라는 비판을 받았다. 김씨의 말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페미니즘 시각으로 문제제기를 하는 이들에 대해 “별 것을 다 불편해하는 프로불편러들”이라고 폄훼 할 때 쓰인다.

일상적이고 사소하게 여겼던 성차별 문화에 문제를 제기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늘면서 일각에서 이들을 ‘프로불편러’라며 조롱하기도 한다. 프로불편러는 ‘전문가(Pro)+불편+ 사람(er)’이 결합된 신조어로 매사에 예민하고 까칠하게 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과연 프로불편러들은 일부러 불편을 만드는 사람들일까. 올해 페미니즘 문제에 목소리를 높인 자칭 프로불편러들을 만나 생각을 들어봤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지난 7일 JTBC TV '아는형님'에 대해 여성 출연자의 성적 대상화, 성소수자 혐오, 출연자간 언어폭력, 방송에 대한 부적절한 언어 사용 등을 이유로 경고 조치했다. 방송화면 캡처

불편함을 말하는 게 불편하다고?

여성 인권이 신장되고 소수의 여성들에게 유리천장도 뚫렸지만 많은 여성들이 여전히 가정에서 고정된 성 역할을 강요 받고 직장에서 성희롱을 당한다. TV 예능프로그램은 가부장적 시선으로 여성을 조롱하고 광고 속에서 성적 대상으로 묘사된다. 이쯤 되면 일상에서 성차별이 다반사로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직장인 송송이(34·여)씨는 “음란물 사이트인 소라넷 사태를 지켜보면서 여성들이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방치했던 성희롱이나 성추행 등이 괴물처럼 커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그 이후 직장 상사나 주변인들의 성희롱 발언을 일일이 지적하고 고쳐주는데 ‘피곤하게 군다’는 핀잔을 듣지만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인터넷에서 프로불편러는 성차별적 행위 등을 지적했을 때 ‘피곤하게 굴지 말라’는 핀잔으로 사용된다. 지난 여름 이화여대 미래라이프대 사업 철회를 요구하는 ‘복면 시위’에 참여했던 성하나(21·가명)씨는 “학생들이 마스크를 쓴 모습을 보고 사회관계형서비스(SNS)에서 ‘외모에 자신 있으면 얼굴을 공개하라’는 비난이 나와 성희롱적 발언이라고 지적했더니 ‘프로불편러’라고 하더라”고 했다. 그는 “시위 때 복면을 금지한 법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마스크를 착용했는데 무턱대고 ‘못생겨서 예민하다’는 식으로 희롱하니 황당했다”며 “감정 때문에 이성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존재로 여기고 의견을 묵살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영상] 프로불편러의 눈으로 바라본 '2016예능'

강남역 살인사건의 교훈 ‘일상 속 혐오’

전문가들은 여성들이 페미니즘 실천에 적극 나선 계기를 지난 5월 발생한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보고 있다. 사건 당시 가해자 김모(34)씨는 “여성에게 무시당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고 여성들은 성별 때문에 살해 대상이 되는 현실에 분개했다. 이 때문에 범행 장소인 강남역 10번 출구에 1주일 사이 피해자를 추모하는 포스트잇이 2만개 이상 붙었다. 당시 거리로 몰려나온 여성들은 “나는 운 좋게 살아 남았다”고 분노하며 일상에서 겪은 공포의 순간들을 털어놓았다.

피해자를 추모하던 여성들이 얘기한 성차별과 성폭력 경험들은 그동안 사소하게 여겼던 것들도 여성혐오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저서 ‘여성혐오가 어때서’에서 “여성혐오는 공기와 같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그것이 문제화 됐을 때만 우리는 공기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했다.

페미니즘 단체 ‘강남역 10번 출구’의 활동가 이지원씨는 “맘충이나 김치녀와 같은 여성에 대한 멸시하는 호칭이나 온라인 게임에서 여성을 비하한 캐릭터를 흔히 보지만 이를 위기로 여기는 사회적 공감대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각종 문화현상에서 보이는 여성혐오적 시선이 심각한 여성폭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렸다”며 “인터넷에서 위기의식을 공유한 여성들이 실제 공간으로 나와 적극적인 페미니즘 운동에 뛰어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지난 5월 18일 여성들이 서울 강남역에서 '묻지마 살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글을 붙이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ankookilbo.com

"불편해도 프로불편러가 좋아요"

프로불편러들은 일상 속에서 모르고 지나갔던 불편한 문제들을 사회문제화 하기 전에 드러내는 존재일 수 있다. 대학생 박효민(24·가명)씨는 “불편한 말이라도 몇 명이 모여서 목소리를 내면 공식적인 문제제기가 되고 기존 담론에 균열을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로불편러들의 문제제기는 외모 지적 안 하기, 사귀는 사람이 있나 묻지 않기, 나이로 차별하지 않기 등 사소한 일상부터 여성혐오성 언어 사용하지 않기, 소수자 배척하지 않기, 인권 존중하기 같은 정치적 구호 등으로 이어진다”며 “모두의 삶을 배려하는 일이기 때문에 계속 프로불편러로 살 것”이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도처에서 터져 나온 페미니즘 목소리가 변화의 물꼬를 텄다. 대학생들은 학내 성추행을 알리는 대자보를 붙였고 문화예술계에서는 일부 작가들의 성희롱이나 성폭력 사례를 줄줄이 폭로했다. 아이돌그룹 방탄소년단과 DJDOC, 랩퍼 산이 등의 여성혐오성 노랫말이 문제가 됐고 메갈리아 티셔츠를 입고 사진을 찍었다고 해고된 성우의 일이 공론화됐다.

지난 8월 보건복지부가 국가건강정보포털에 여성의 가슴에 대한 미적 기준을 정의한 글이 뒤늦게 알려져 논란이 됐다. 보건복지부는 이상적인 가슴 형태를 열거한 글에 대해 여성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이 글을 삭제했다.

프로불편러라는 단어, 긍정적으로 쓰기

페미니스트들을 혐오하는 부정적 시선은 왜 뿌리뽑기 어려울까. 전문가들은“사회적 약자와 달리 권력자들은 일상 속에서 차별과 혐오를 겪을 일이 없기 때문에 약자들의 목소리에 둔감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프로둔감러도 있다는 얘기다.

여성을 혐오하거나 조롱하는 언어는 시대마다 반복되고 있다. 여성학자 김신현경씨는 “1990년대 후반 여성운동이 뜨겁게 조직화된 시기에 '꼴페미'라는 비난이 거셌다”며 “여성운동이 한풀 꺾인 2000년대 페미니스트를 직접 조롱하는 언어보다 ‘된장녀 대 개념녀’프레임으로 여성을 평가하거나 ‘김치녀’라고 싸잡아 비판하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그는 “프로불편러도 지난해 메갈리아 사태 이후 인터넷에서 남녀간 설전이 오가는 일이 잦아지자 여성을 깎아 내리는 뜻으로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긍정적인 면도 있다. 김씨는 “그 동안 여성비하적 언어들이 모두 부정적으로 사용됐던 것과 달리 젊은 페미니스트들을 중심으로 프로불편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 한다”고 말했다.

2017년에도 일상에서 까칠한 질문을 던지는 프로불편러들의 활약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김씨는 “청년 여성들은 일상의 불의에 분노하는데 그치지 않고 깊이 있는 공부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의지가 있다”며 “박근혜ㆍ최순실 게이트 국면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낸 여성들이 내년에는 페미니즘 시각에서 다양한 사회문제를 활발히 논의하고 공론화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정유경인턴기자(서강대 프랑스문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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