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발언
주디스 버틀러 지음ㆍ유민석 옮김
알렙 발행ㆍ372쪽ㆍ1만8,000원
“언니 왔다.” 최근 이화여대 미래라이프대학 신설에 반대하는 재학생들의 농성에 참가한 졸업생들의 손에 들려 있던 문구다. 여성 혐오 화두가 어느 때보다 뜨거운 요즘, 때맞춰 번역된 주디스 버틀러의 책 ‘혐오 발언’은 이 땅의 페미니스트들에게 “언니 왔다”의 글로벌 버전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페미니스트이자 가장 영향력 있는 젠더 이론가, 부글부글 끓는 불반도에 버틀러 언니가 왔다!
그러나 버틀러의 전작을 읽어본 이라면 그가 막힌 속을 뚫는‘사이다’ 역할을 해주지 않을 거란 예상쯤은 할 수 있다. 개념 전복을 업으로 삼는 학자들 중에서도 가장 집요하게 전복적인 버틀러의 시선은 현상이 아닌 그 아래, 지하 50층쯤에 머물러 있고 그것을 끌어 올려 땅 위를 적시는 것은 읽는 자의 몫이다. 여기에 ‘최악의 저자 상’을 수상한 적 있을 만큼 극악의 난이도는 그의 문장으로 뛰어 드는 걸 망설이게 한다. 이번 책도 각오해야 한다. 다행히 버틀러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고 혐오, 차별, 퀴어에 관해 글을 써온 유민석씨가 번역과 해제를 맡아 이해를 돕는다.
‘혐오 발언’은 1997년 책이다. 버틀러는 여기서 혐오 발언의 법적 제재를 반대한다. 여성, 흑인, 동성애자, 장애인 등 소수자에 행해지는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발언을 법으로 제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에 맞서 저자는 국가에게 혐오 발언을 ‘감별’할 역할을 맡겨선 안 된다고 말한다. 국가가 감시의 역할을 검열과 억압으로 바꿔치기 한 역사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아예 혐오 발언에 대한 어떤 규제도 만들지 말자고 제안한다. 국가뿐 아니라 개인에 의해서도 통제될 수 없는 말의 ‘본성’ 때문이다.
혐오 발언을 규제하려는 이유는 그것이 상처를 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마리 마츠다, 캐서린 매키넌, 레이 랭턴 등 많은 학자들이 혐오 발언을 단순히 말이 아닌 폭력이자 차별 행위로 간주했다. ‘흑인 출입 금지’ ‘여자는 3일에 한 번 패야 한다’는 말은 곧 “언어적 따귀”다. 혐오 발언이 사회적 약자에게 열등하다고 선언하고 이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행위’라는 의견은 일견 상식으로 보인다.
그러나 버틀러에 따르면 이들의 주장은 언어의 권력을 ‘과신’해서 나온 오류다. 그는 모든 혐오 발언이 명사수의 총알처럼 늘 수신자를 관통하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어떤 말은 혐오를 전달할 뿐 아니라 상처를 주는 행위에 해당한다고 수사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언어가 행위한다는 것을 가정할 뿐 아니라 언어가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그 말을 건네 받은 자에게 작용한다는 것을 가정한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다른 주장이란 점에서 중요하며, 모든 언어 행위가 타자에게 그런 권력을 가지고 작용하는 행위의 일종인 것은 아니다.”
버틀러가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혐오 발언에 면죄부를 주기 위함은 당연히 아니다. 혐오 발언이 그다지 전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저자는 혐오 발언의 발신자와 수신자 간 간격을 벌린다. 이 간격을 통해 수신자는 혐오 발언을 되받아 칠 수 있다. 일례로 검둥이를 뜻하는 니거(nigger)를 웬만한 백인보다 수입이 좋은 흑인 래퍼가 사용할 때 그 말의 모욕적 힘은 너무 쉽게 무너져 내린다. 총알이 불발되는 것이다.
버틀러의 주장은 지금 페미니즘 논쟁의 핵심인 ‘미러링’과 직결된다. 그에 따르면 혐오 발언에 절대적인 힘이란 없으며 혁신과 전복, 패러디와 풍자에는 특히 취약하다. ‘여류 작가의 처녀작’을 ‘남류 작가의 동정작’으로 뒤집는 순간 본래의 말에 내재된 차별과 구속의 권력은 힘없이 쏟아져 나온다. 당시 버틀러의 주장에 많은 학자들이 회의를 표했지만, 한때의 형이상학은 20년 후 바다를 건너 한국 사회의 형이하학이 됐다.
개국 이래 가장 똑똑하고 가장 상스러운 여자들의 탄생에 버틀러는 사이다가 아니라 휘발유를 붓는다. “만일 동일한 발언이 되받아쳐 말하기(speaking back)와 그것으로 말하기(speaking through)의 계기가 됨으로써 그 발언을 건네 받은 자에 의해 차지되고 변하게 된다면, 인종차별 발언은 어느 정도는 자신의 인종차별적 기원으로부터 이탈되지 않을까?”
되받아 쳐라, 그럼으로써 차지하라. 언어도, 권력도 영원한 주인은 없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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