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독학이 고독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독학을 즐기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는 이들을 ‘덕후’라고 지칭한다. ‘덕후’는 ‘오타쿠’라는 일본어의 한국식 표현인 ‘오덕후’의 줄임말이다. 남다른 관심과 특정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회적 소수자였던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오히려 쓸모없는 것들에 집중하는 사회부적응자라는 인상이 강했다.
최근에 ‘덕후’는 ‘능력자’라는 키워드로 새롭게 주목 받고 있다. 이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시간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한 인간이 감내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와 지식이 생산되는 세상에서 ‘나’라는 인간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정체성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덕후 문화’는 새로운 시사점을 던져준다.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용기가 필요한 때이다. ‘나’를 스스로 설명하고 있는 덕후들은 몰개성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또 다른 독학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조선 최초의 철덕(鐵德) 박기종
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이 체결된 이후, 조선에서는 일본의 요청에 따라 제1차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제1차 수신사 일행의 면면을 살펴보면 역관(譯官)으로 참여한 사람 중에 박기종이라는 인물이 있다. 부산에서 출생한 박기종은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서민 출신으로 조선 상인과 일본 상인 주변에서 일본어와 상업을 배워 거간(居間) 일을 맡아보았다. 생존을 위한 독학은 그에게 역관이라는 기회를 주었고, 마침내 당대 경남 제일의 재력가ㆍ사업가라는 별칭을 얻으며 중추원의관과 판리공사 등 관직을 역임하기에 이른다.
그는 철도와 교육이 조선의 근대를 실행할 수 있는 최우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일평생을 철도부설사업과 교육사업에 헌신한다. 노무현 대통령의 출신 학교인 부산상고(현 부산개성고)는 부산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식 학교이다. 박기종이 부산경무관에 취임한 후, 신식교육기관을 창립하기 위해 부산 지역 유지들과 뜻을 모아 사재를 출연하여 1896년 개성학교로 처음 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기종과 기차와의 인연은 1차 수신사 일행이 승차했던 특별열차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기수를 대표로 약 75명으로 구성된 수신사 일행이 일본 요코하마에 당도하자, 외무성 관리가 마중 나와 특별열차를 타고 도쿄로 이동했다. 김기수는 이 특별열차를 앞에 두고 이게 긴 복도가 이어진 집(長行廊)인 줄로만 알았다던 일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박기종도 이 특별열차를 통해 처음 기차를 접했다. 1880년 2차 김홍집 수신사 일행의 역관으로 참여하여 재차 일본을 시찰하면서 박기종은 철도라는 근대기계문명을 신뢰하게 된다.
박기종의 정체성은 철도부설사업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조선인으로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1897년 부산철도회사를 조직하여 농상공부에 허가를 신청하였다. 그가 눈여겨본 곳은 하단포였다.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조선 최초로 부산이 개항된 이후, 전국의 물산들이 더욱 집중되었다. 부산항 서쪽에는 낙동강 하구가 있었고, 낙동강은 내륙으로부터 쌀을 비롯한 모든 물산들을 배로 실어 나르는 중요한 물길이었다. 더군다나 하구의 끝에 위치한 명지(현 부산 강서구 남단)는 전국 최대의 염전으로 명성이 높았다.
하단포는 바다와 육지의 산물을 교환하며 번성한 포구였다. 박기종은 경무관에 취임하면서 하단포와 부산항을 연결하여 각종 산물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운송수단을 생각했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요코하마에서 보았던 장행랑이었다. 서류가 미비하다는 이유로 반려되었던 부산철도회사 신청 건은 이듬해 5월 ‘부하철도회사(釜下鐵道會社)’라는 명칭으로 재신청하여 허가를 얻었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민간철도회사이다. 자본금 약 10만5,000원의 주식회사로 창립하였고, 이들은 경편 철도를 계획하였다. 당시 조선인의 주목을 받으며 다수의 유지들이 동참하였다고 한다.
철도 부설 실패, 즐길 수 없는 독학
1899년에는 대한철도회사를 주도적으로 창립하였고 프랑스 회사가 소유하고 있던 부설권의 기한이 만료되자 즉시 정부에 신청서를 제출하여 승인을 얻는다. 이로써 경의선ㆍ경원선, 함경선의 부설권을 획득하여 한성 이북의 주요 간선철도망을 건설할 수 있는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지선철도로 눈을 돌리면서 1902년에는 영남지선철도회사의 설립을 이끌었다.
이 회사의 우선 사업대상 노선은 삼랑진-마산의 경부선 지선철도로, ‘삼마철도’라고도 불리었는데 경제성도 높은 노선이었다. 철도라는 기계문명을 통해 근대를 기획하고, 세 차례나 민간철도회사를 출자했던 박기종의 집념은 남달랐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건설한 선로에서 화륜거(火輪車)가 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그는 조선 최초의 ‘철덕’(철도 덕후)이었다.
박기종은 조선 최초로 민간회사를 건립하고 철도사업에 전력하여 후대에 ‘철도왕’이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둘째 아들을 철도학교로 유학을 보낼 만큼 그의 철도 사랑은 각별했지만 박기종의 철도부설사업은 모두 실패했다. 당시에 대규모 자본이 투입되는 공공사업을 조선인 1인이 계획하고 실현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박기종은 뜻을 모은 유지들과 함께 회사를 조직하였지만, 사실상 주도적으로 회사를 창립하고 업무를 추진했던 사람은 박기종 혼자였다. 그가 처음으로 기획했던 ‘부하철도’는 수차례 측량을 실시한 후, 공사에 착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기술과 자금의 부족은 해결할 수 없는 난관이었다. 무엇보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본격적으로 경부선 부설을 추진하면서 부하철도의 사업성은 현저히 낮아졌다. 한반도를 관통하며 왜관-삼랑진-구포 등 낙동강 중하류의 주요 포구도 경유하는 경부선의 개통이 확정되면서 낙동강 하구에서 부산항을 연결하는 철도를 따로 건설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경의선과 경원선, 함경선의 부설권을 획득했던 대한철도회사의 사업 범위는 애당초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창립 이후 관료들의 봉급 일정액을 출자하는 등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여 민간 자금을 동원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사업에 필요한 거액을 모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착공조차 하지 못한 채, 부설권을 둘러싸고 일본이 직ㆍ간접으로 개입하는 상황까지 벌어지자 부설권은 대한제국 직영 서북철도국으로 이관되었다.
한국 철도 박기종에게 배워라
한편, 영남지선철도회사의 주 사업노선인 삼마선은 일본이 경부선의 지선으로 구상 중이었다. 일본은 박기종이 부설권을 획득하자 그가 자금이 부족할 것을 예상하고 차관의 도입을 제안하였다. 결국 영남지선철도회사의 자본과 실권은 일본이 장악하였다. 그마저도 러일전쟁이 개전하면서 대부분의 주요철도노선을 군용철도로 건설하기로 함에 따라 박기종이 남긴 회사명마저도 사라져버렸다.
일부에서는 부하철도사업 실패에 따른 손실을 만회하고자 영남지선철도회사의 창립 초기부터 일본 공사와 교섭을 시도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박기종은 끝까지 나의 손으로 철도를 부설하기를 고대하며 그의 인생을 자신이 주도한 철도회사에 헌신했다. 실패로 끝난 철도부설의 꿈은 즐길 수 없는 독학의 시간들이었다. 꿈은 좌절되었지만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도전했던 역사의 현장은 사업가로서의 박기종이 아닌, 철도를 좋아했던 박기종이라는 한 사람의 정체성을 증명해준다.
조선에 처음 철도가 개통한지 120여년이 흘렀다. 현재 서울 지하철 9호선을 시작으로 수서발 KTX에 이르기까지 철도 민영화는 효율과 경쟁을 통한 적자보전의 현실적 대안이 되어 질주한다. 눈여겨볼 점은 박기종이 추구했던 민간철도회사가 오늘날 철도 민영화를 주장하는 철도기업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조선인 스스로 철도를 부설하여 운영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고, 철도를 근대의 선도자로 지목하였다. 그에게 철도는 공공재였다. 오히려 제국 열강은 조선에 건설 예정인 철도에 대하여 자국의 이익에 견주어 투자 여부를 결정하였다. 오늘날 초국적 기업이 거대자본을 증식시킬 수 있는 투자처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모습과 유사하다.
지금 한국 철도는 자신의 탄생기부터 다시 공부해야 한다. 박기종은 그 기억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선배 독학자이다. 조선 철도 탄생의 실패담, 박기종은 한국 철도의 현재를 고민하는 출발점이다.
장병극 철도 문화사 연구자
공동기획: 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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