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말[馬]의 힘을 가장 많이 활용한 시대는 언제일까. 별 다른 운송수단이나 농기구가 없던 수천 년 전 선사시대를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의외로 마력의 활용도가 가장 높았던 시기는 20세기 초반이다. 1900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산업화한 국가였던 영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증기기관 발명과 산업혁명으로 사회의 패러다임이 바뀌고도 100여 년이 더 지난 시대, 자동차와 기차가 인류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던 시기에 오히려 말의 활용도가 전보다 더 높아졌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이 같은 아이러니를 꿰뚫는 책이 나왔다. 데이비드 에저턴 런던 킹스칼리지 교수의 새 책 ‘낡고 오래된 것들의 세계사’는 3D프린터, 우주비행, 스마트폰 등 최첨단 기술이 아니라 석탄, 자전거, 콘돔, 말 등 인류가 오래 전부터 사용한 기술에 주목한다. 저자는 이를 통해 ‘기술은 늘 미래 지향적이고 시대의 변화를 이끈다’는 통념은 선입견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실제로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했다고 곧바로 사회가 변화하지 않으며 늘 사용해 왔던 오래된 기술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 산업화 이후 거의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석탄은 19세기보다 오늘날 더 많이 생산되며 매년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자전거의 수는 여전히 자동차 생산량보다 월등히 많다. 1960년대 후반 판매량 정점을 찍은 콘돔은 그 후 경구 피임약의 등장에 밀려 피임도구 업계에서 사라지는 듯 했지만 에이즈가 창궐한 1980년대 재등장했다.
저자는 단순 도구나 발명품을 되짚는 데서 그치지 않고 최첨단 기술의 집약체라 불리는 항공, 무기 분야의 어제와 오늘도 파헤친다. 2004년 마하 10(약 시속 1만1,000㎞)의 비행속도로 기네스북에 오른 X-34A는 추진로켓에 의해 3만3,000m 상공으로 옮겨진 후 약 10초간의 비행을 한 것이 고작이었다. 심지어 상공 1만2,000m까지는 X-34A와 추진로켓 모두 1950년대 개발된 B-52B 전투기에 실려 운반됐다. 저자는 X-34A의 처녀비행 성공담을 “1950년대 비행기를 가지고 1960년대 조종사들보다 조금 빨리 나는 무인기를 발사한 것”이라고 요약한다. 또 1ㆍ2차 세계대전을 겪은 20세기 전쟁의 수많은 희생은 독가스, 원자폭탄 등 신무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포, 소총, 폭탄 등 재래식 무기를 개량한 기술 때문에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통념을 깨나가는 저자의 관점은 신선하지만 펼치기 전 심호흡이 필요한 책이다. 책 초반 새로운 시각에 재미를 느끼지만 2장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이후부터는 동어반복적인 병렬식 구성이 이어진다. 기술사에 큰 관심이 없다면 지루하게 느낄 수 있다. 대단한 통찰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아예 책을 펼치지 않는 편이 나을 수 있다. 책을 통해 깨닫는 통찰은 ‘오래된 기술도 여전히 효용가치가 높다’는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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