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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하는 남자가 로망? 결혼 후에도 과연…

입력
2015.04.01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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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싼 도시락 데이트서 인기, 취미·개성으로 여성에 어필 대세

쿡방 남성에게 요리는 놀이의 연장, 진지한 접근보다 뽐내는 수단일뿐

주방에 대한 남녀 역할 인식 여전해

이승준씨는 대기업 입사를 꿈꾸는 평범한 취업준비생이지만 주말에는 책을 내려놓고 프라이팬을 든다.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곰셰프'로 불린다. 이현주기자 memory@hk.co.kr
이승준씨는 대기업 입사를 꿈꾸는 평범한 취업준비생이지만 주말에는 책을 내려놓고 프라이팬을 든다.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곰셰프'로 불린다. 이현주기자 memory@hk.co.kr

포근한 3월의 주말, 한 연인이 서울 신대방동 보라매공원을 찾았다. 적당한 곳에 돗자리를 펴고 김성수(30ㆍ가명ㆍ회사원)씨가 ‘회심’의 도시락을 꺼내 든다. 주중 내내 일로 지친 여자친구를 달래주기 위해 준비한 훈제오리 닭가슴살 덮밥과 과일 디저트다. 야외 데이트의 낭만인 도시락은 이제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자고로 ‘요리 잘하는 남자’가 선망 받는 요즘, 김씨는 이날 여자친구에게 점수를 제대로 땄다.

차줌마, 꽃미남 셰프 등 요리하는 남자가 등장하는 이른바 ‘쿡방(Cook+방송)’이 새로운 방송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2030 남성들 사이에서 요리가 갖는 의미가 달라졌다. 어릴 적에는 “부엌에 들어가면 XX가 떨어진다”는 보수적인 할머니 밑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크지만 이제 그들에게 요리는 취미, 개성, 여가이며 동시에 이성에게 어필할 수 있는 도구가 됐다.

이씨의 부엌 한 편을 차지한 책장에는 각종 요리 자재와 전공 서적들이 공존하고 있다.
이씨의 부엌 한 편을 차지한 책장에는 각종 요리 자재와 전공 서적들이 공존하고 있다.

평범한 경제학도 출신으로 취업준비생인 이승준(30)씨는 ‘베어 그릴스(Bear Grills)’의 사장이자, 셰프다. 베어 그릴스는 음식점 상호처럼 들리지만 사실 이씨의 자취방을 이르는 말. 188㎝의 거구를 자랑하는 이씨는 주말이면 지인들을 베어 그릴스로 초대해 아기자기한 요리 솜씨를 뽐낸다. 흰 셔츠, 까만 앞치마까지 갖춰 입고 요리하는 그에게 지인들은 ‘곰셰프’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베어 그릴스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됐다.

'곰셰프' 이씨의 자취방은 지인들 사이에서 '베어 그릴스(Bear Grills)'라 불린다.
'곰셰프' 이씨의 자취방은 지인들 사이에서 '베어 그릴스(Bear Grills)'라 불린다.

8평 남짓한 자취방 부엌에는 이씨 한 명만 들어서도 꽉 찰 정도다. 하지만 그 좁은 공간에 각종 살림살이들이 꼼꼼히 들어차 있다. 식자재를 보관하는 137리터, 364리터짜리 냉장고 두 개는 물론, 야채 탈수기, 찜기, 초시계, 저울, 미니 오븐, 각종 효소, 직접 담근 과일청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접시, 와인잔, 수저는 4인 세트로 마련돼 있는 데다가, 테이블은 심지어 6인용이다. 싱크대에는 새빨간 고무 장갑이 가지런히 매달려 있다. 2년 전부터 자취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요리를 취미로 삼은 이씨는 “하숙할 때는 세 박스에 불과하던 짐이 이제는 용달 아저씨를 불러야 할 정도”라고 말했다.

이씨는 비용을 충당하기 어려워 친구들에게 재료비만 받고 요리하고 있다. 라면에 계란만 풀어 내줄 때도 있고, 두당 5만원짜리 코스 요리를 할 때도 있어 가격은 천차만별. 이씨는“돈 받고 하니까 더 자부심 갖고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취업 준비로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놀이공원 가듯 식자재 구경하러 자취방 주변 마트를 탐방한다. 백화점 쇼핑은 힘들어도 마트 쇼핑은 즐겁다”며 웃었다.

지난달 28일 베어 그릴스로 친구 2명을 초대한 이씨는 삼겹살 간장조림과 매쉬드 포테이토, 연어 샐러드, 새우 크림 리조또, 카프레제 샐러드, 베이컨 동태말이 등을 준비했다. 친구들은 “어디 가서 돈 주고도 이런 거 못 먹는다”며 탄성을 내뱉었다. 이씨를 두고 친구들은 “아직 여자친구는 없지만 누가 데려갈 지 정말 행운아다”라고 입을 모은다. 주변 남성들 사이에서도 레시피를 알려달라는 문의가 늘었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다.

이씨가 지난달 28일 서울 연희동 자취방에서 친구들 2명을 위해 차린 식탁.
이씨가 지난달 28일 서울 연희동 자취방에서 친구들 2명을 위해 차린 식탁.

윤정욱(26ㆍ대학생)씨의 취향은 더욱 ‘여성적’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티라미수, 마카다미아 쿠키 등 직접 만든 음식 사진을 올리는 그의 취미는 베이킹. 고등학교 2학년 11월 11일, 좋아하는 여학생에게 직접 만든 ‘수제 빼빼로’를 건넸던 게 시작이었다.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윤씨는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같은 기념일에 여자친구에게 수제초콜릿 만들어주곤 했다. 윤씨는 “최근 요리 프로그램을 보면서 조리 도구, 식기 등에도 욕심이 생겼다. 베이킹뿐만 아니라 요리에도 도전 중”이라고 밝혔다. 재료 구매를 위해 방산 시장도 직접 찾는다는 윤씨는 최근 쿡방 유행에 대해 “여성적인 것으로 인식됐던 요리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지는 중인 것 같다”고 평가했다.

방산시장에서 요리 도구를 판매하는 지종설(62)씨는 “최근 2~3년 사이 화이트데이, 빼빼로 데이에 젊은 남성 손님들이 더러 찾아오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대부분 쭈뼛거리며 들어와 “뭐가 잘나가요?, 뭐 괜찮은 거 있어요?”라고 묻는다는 것. 지씨는 “요리를 취미로 삼는 젊은 남성들이 늘어나면서 남성 손님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맞벌이 부부가 크게 늘어난 요즘 요리 잘하는 남자는 여성들의 로망이기도 하다. 박주현(25ㆍ대학원생)씨는 아예 남편의 요리 솜씨에 반해서 결혼을 결심한 경우다. 박씨는 “남편의 갈비찜을 평생 먹기 위해 결혼했다”고 말한다. 남편 권순교(33ㆍ회계사)씨는 “아내와 데이트 할 때 요리가 취미인 것이 유용했다”며 “싱글인 남성들에게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다면 집으로 초대해 연어스테이크, 와인 등 깔끔한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좋다”고 추천했다.

하지만 막상 젊은 남성들이 결혼 후에도 적극적으로 주방 일에 팔 걷고 나설 것이냐는 데에는 여전히 물음표가 찍힌다. 양식 요리를 전공한 요리사 이성민(25)씨는 “남자가 가사일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미디어는 마치 요리가 이성을 유혹할 수 있는 것처럼 도구화하는 것 같아 못마땅하다”고 말했다. 요리 그 자체에 진지하게 접근하기 보다는 단순히 스스로를 뽐낼 수 있는 도구로 비춰진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이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쿡방 속 남성들의 요리는 가사가 아닌 소꿉놀이”라며 “여자들은 남자들이 가사 중 하나인 요리를 하는 것을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남자들에게는 놀이의 연장선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요리하는 남자들이 늘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요리는 여자에게 가사, 남자에게 취미로 머무르고 있다는 점이다. 요리에 대한 남녀의 전통적인 역할 구분이 아직까지는 주효한 셈이다.

요리가 가사라는 공식은 비단 여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공식은 아니다. 취사병 출신인 변상근(29ㆍ취준생)씨는 이른바 ‘생계형’으로 요리하는 남자다. 변씨는 “화려한 쿡방이 유행하지만 나와는 상관 없는 얘기”라며 “빨리 먹고 빨리 치울 수 있는 밥, 국, 찌개 등이 주요 메뉴”라고 말했다. 2009년부터 자취를 해온 변씨에게 요리는 식사 해결을 위한 가사일 뿐 취미나 여가가 될 수 없다는 얘기다. 변씨는 “쿡방에서 배우 차승원이 완벽한 남자로 등장하는데, 같은 남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부담이다. 배우 송일국의 육아를 볼 때와 마찬가지로 ‘나도 나중에는 저런 남편이어야 하나’싶은 생각이 든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도 변 씨는 ‘요리 잘하는 남자가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요즘 트렌드를 적극 이용할 생각. 그는 “내가 요리가 취미라고 했을 때 주변 여성들이 더 관심을 기울이곤 한다. 호감 있는 여성에게 이러한 부분을 적극 어필할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이현주기자 memory@hk.co.kr

금보령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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