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학생들은 수도권 대학도 가기 힘든데 말문이 막히네요.”
강원 삼척고 3학년 김오연(18)군은 19일 4시간 넘는 먼 길을 달려 서울로 왔다. 이날 박근혜 대통령을 규탄하는 청소년 시국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김군은 이틀 전인 17일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고 고사장에서 나온 직후 뉴스를 접하고 서울행을 결심했다. 비선실세 최순실씨 딸의 입사ㆍ학사 비리에 속이 부글부글 끓던 차에 조카인 장시호씨의 입시 부정 의혹까지 터져 나오면서 집에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김군은 “돈만 많으면 다 되는 현실을 보고 과연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사회인지 답을 찾으려 집회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한 달 넘게 이어지면서 10대 청소년들은 세대를 초월하고 하나된 민심을 상징하는 주역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날 60만명이 모인 서울 광화문광장 4차 촛불집회에도 수는 적었지만 수능을 마친 고3 수험생, 교복을 입은 고교생, 이제 막 초등학생 티를 벗은 중학교 새내기 등 참신한 아이디어로 무장한 다양한 연령대의 청소년들이 자리를 메우며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시국집회를 축제로 이끌었다.
10대의 분노는 거창하지 않았다.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당연한 믿음이 깨진 데에서 출발했다. 시국대회 자유발언에 나선 서울 여의도중 3학년 이서현(15)양은 “정유라보다 점수가 높은 학생이 2명 더 있었는데 탈락한 것은 부당하다”고 외쳤다. 촛불집회 행진에 나선 고교 2학년 김모(17)양도 “내년이면 대입 수험생이 될 우리가 말도 안 되는 입시비리를 지켜보면서 무기력증을 느끼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다.
신분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분노는 청소년들도 민심의 한 주체로 나서야 한다는 정치적 자각으로 이어지고 있다. 서울 예일여고 3학년 남지원(18)양은 “학생은 공부나 하라고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살 나라인데 어떻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자유발언 무대에 오른 한 여학생은 “북한도 무서워서 못 내려온다는 중학교 2학년이다. 그런데 박근혜씨는 하도 안 내려와서 내가 올라왔다”며 행동에 주저하는 기성세대를 꼬집었다.
이들은 평화집회의 주역이기도 했다. 이날 폭력 위험수위가 가장 높았던 지하철 경복궁역 사거리 내자동로터리 차벽 앞에는 교복을 입은 중ㆍ고교생들이 진을 치고 경찰과 시위대의 완충 역할을 했다. 대열 앞에 선 중학교 3학년 김익현(15)군은 “무장한 경찰관들을 처음 봤지만 우리의 형이고 누군가의 아들”이라며 꽃을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경찰의 태도도 달랐다. 집회가 거의 마무리된 자정 무렵 한 경찰관은 교복 차림의 여고생들에게 “수능은 어땠느냐”며 안부를 물었다. 왁자한 여고생들의 재잘거림 속에 4차 촛불집회는 아무 일 없이 끝났다.
정반석 기자 banseok@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