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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경제외교, 우물쭈물 고질병

입력
2015.06.17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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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바뀌니 온실가스감축약속 후퇴

TPP AIIB에 이어 또 근시안 결정

경제성공 넘어 신뢰 이미지 쌓아야

임재규 에너지경제연구원 기후변화정책연구본부장이 11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제1공용브리핑룸에서 열린 정부의 2030년 온실가스 감축목표 발표 브리핑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임재규 에너지경제연구원 기후변화정책연구본부장이 11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제1공용브리핑룸에서 열린 정부의 2030년 온실가스 감축목표 발표 브리핑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몇몇 ‘녹색’전문가들은 지난달 방한했던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발언 한 대목을 매우 심각하게 봤다고 한다. 당시 반 총장은 한 강연에서 한국이 국제적으로 기후변화와 녹색성장의 모델국가로 여겨지고 있다고 전한 뒤 “6월말까지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유엔기후변화협약에 제출하려는 한국정부의 노력을 환영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감축안은) 야심차고 신뢰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언뜻 보면 의례적인 말 같지만 전문가들은 반 총장이 말하려는 핵심은 ‘야심차고 신뢰할 만한(ambitious and credible)’, 이 두 단어 안에 다 들어있다고 해석했다. 그가 굳이 이 표현을 쓴 건, 한국정부가 제출할 온실가스 감축안이 그다지 전향적이지도 신뢰할 만하지도 않을 것 같다는 우려의 표시인 동시에 녹색성장 선도국가로서 그러면 안 된다는 충고의 메시지라는 것이었다.

결과는 그대로였다. 지난 11일 정부가 공개한 온실가스감축 시나리오는 기존 목표보다 한층 후퇴한 것이었다. 정부는 2030년 온실가스배출량을 배출전망치(BAU) 대비 적게는 14.7% 많게는 31.3%까지 줄인다는 4가지 안을 제시했는데, 채택가능성이 사실상 전무한 가장 강력한 안을 빼면 어떤 시나리오를 택해도 2009년 제출했던 기존목표(2020년 BAU 대비 30% 감축)보다 뒷걸음치게 된다.

이렇듯 정부가 야심차고 신뢰할 만하기는커녕, 오히려 기후변화협약상의 ‘후퇴금지(no backsliding)’원칙까지 외면한 안을 던진 건 순전히 경제적 이유 때문이다. 화력발전과 제조업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에서 온실가스 강제감축이 기업 수익감소와 국민경제 전체의 비용상승으로 이어지는 건 맞다. 지금도 기업들은 대폭 완화된 안에조차 여전히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다. 100% 옳은 건 아니었다 해도 어쨌든 한국은 2009년에 온실가스감축 모범국가가 되겠다고 대외적으로 선언했다. 내로라하는 경쟁국들을 제치고 사상 첫 국제기구(녹색기후기금ㆍGCF) 유치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하지만 5년여가 흘러 정부는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강력한 감축안을 내놓았던 2009년과 후퇴된 안을 만지작거리는 2015년 사이 달라진 게 있다면 딱 하나, 이명박정부가 박근혜정부로 바뀌었다는 것뿐이다. 현 정부는 ‘녹색’이 지난 정부의 브랜드이고 온실가스 대량 감축 역시 지난 정부의 약속이라 별 구속력을 느끼지 않는 것 같은데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생각이다. 저탄소는 국제적으로 합의된 아젠다인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구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실천 과제인데, 한국에선 정권이 바뀌면 대외적 약속도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세계의 리더그룹들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는지. 당장 손익이 걱정되더라도 자꾸 뒤로 물러날 게 아니라, 부담 속에서도 도덕적 의무를 이행한다는 대범한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다. 국가이익, 자국기업이익이라면 악마와도 기꺼이 손을 잡는 경제전쟁터이지만 신뢰와 평판은 여전히 경제외교의 중요 기준이며 선진국일수록 그 힘은 더 강력하다.

우물쭈물, 미적미적거리다가 신뢰도 실리도 잃은 게 이번 만은 아니다. 미국이 주도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 때도, 중국이 만든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가입 때도 그랬다. 중국 눈치 보느라 TPP 창립멤버자격을 놓치고 뒤늦게 미국을 찾아갔지만 결국 퇴짜를 맞는 수모를 겪었는데, 그렇다고 중국으로부터 뭘 얻은 건 없다. 반대로 미국 장단 맞추느라 AIIB 가입선언 타이밍이 계속 늦어지는 바람에 서열은 뒤로 밀리게 됐지만, 역시 미국으로부터 위로와 보상을 받은 건 없다. 차라리 둘 다 먼저 손을 들었으면 어땠을는지.

한국의 경제적 성공은 세계적으로 여전히 경이의 대상이다. 하지만 이 정도 성숙했으면 정부도 ‘어메이징(amazing) 코리아’ 보다 ‘크레더블(credible) 코리아’에 더 신경 쓸 때가 됐다.

이성철부국장 sc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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