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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78)앙드레 김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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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78)앙드레 김과 나

입력
2002.07.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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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4일 인천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포르투갈전.후배 코미디언 이용식(李龍植) 이봉원(李俸源)과 함께 경기를 보고 있는데 주위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앙드레 김이 왔다. 관중석 맨 앞에서 관전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관중석을 이리저리 눈 여겨 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의 표정이 눈 앞에 보이는 듯했다. 혼자서는 절대로 행사장에 참석하지 않고, 참석해서는 무조건 맨 앞 줄에 앉는 것을 고집해온 그이다.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67)과 나는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매우 각별한 사이다.

내가 1980년 TV를 통해 유명해진 후 처음 의상협찬을 해준 사람이 바로 앙드레 김이다. 그 해 가을 그가 방송사로 찾아와서는 어깨 선이 풍부한 속칭 ‘우주복’을 네 벌이나 선물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하나씩 입으라고 네 벌이었다. 치수를 잰 적도 없는데 귀신같이 옷이 맞았다.

이후 그는 내 자선공연이나 디너쇼가 있을 때면 항상 앞에 앉아 구경했다.

늘 30석 정도 표를 사서 친한 외국인이나 연예인, 주한 외교사절을 초청하는 게 그의 습관이었다. 83년 3월 나와 조용필(趙容弼)이 프랑스 문화부 초청으로 파리로 떠나기 전 축하파티를 마련해준 것도 그였다.

그날 그 자리에는 우리들 외에도 주한 프랑스문화원장, 주한 미국총영사 등 쟁쟁한 내빈이 수두룩했다.

그런데 이렇게 나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애를 써준 양반이 종종 코미디 소재로 이용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특히 99년 옷 로비 청문회 때 그의 본명 ‘김봉남(金鳳男)’이 알려지자 일부 몰지각한 젊은 연예인은 그의 말투와 본명을 갖고 말장난을 많이 했다.

그의 인격이나 프로근성, 애국심의 100분의1도 못 좇아가는 놈들이 그 양반을 놀릴 때면 정말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다.

내가 아는 한 그는 대한민국의 숨은 외교관이다.

주한 외교사절의 이ㆍ취임식 때면 그는 언제나 만찬을 열어 외교사절 부인들에게 멋진 드레스를 2벌씩 선물한다.

주한 외교사절 사이에서 ‘앙드레 김 없이는 인수인계가 안 된다’는 말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때 연예인들이 외국비자를 받지 못하면 누구보다도 먼저 그에게 달려가곤 했었다. 내가 파리에 갔을 때 만난 외국 인사들도 그의 안부부터 물었다.

그는 또한 젊은이 못지않은 프로이다. 80년대 말 내가 서울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한 방송사 생방송 프로그램에서 사회를 본 적이 있다.

조용필이 노래를 부르고 앙드레 김이 프로그램 막판 20분 동안 패션 쇼를 여는 자선 공연이었다.

그런데 공연 순서가 자꾸 지연되는 바람에 패션 쇼를 10분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고, 그때 우리들은 그의 프로근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시간이 모자란다’는 말을 듣자마자 곧바로 연출가와 조명기사 등 자신보다 훨씬 어린 스태프에게 통사정을 하기 시작했다.

“10분만 해서는 내 작품을 제대로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방송사는 생방송 다음 프로그램을 10분 늦게 시작하는 편법을 동원해 그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줬다.

무대 뒤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의 옷은 완전히 땀 범벅이 돼 있었다.

그가 내게 자주 들려준 말이 하나 있다. “유명해진 스타에게 내 옷을 선물하는 것을 30년 넘게 해왔다. 그들이 내 옷을 입을 때 나는 가장 기쁘다. 그 이상의 이유는 없다.”

나이 일흔이 돼오는 그를 더 이상 코미디 소재로 삼지 말아달라고 후배 연예인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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