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한국의 지방정부가
한국문학에 이렇게 열광했나
솔직한 관심은 딸려오는 돈
美ㆍ유럽은 작가의 지역성 존중해
중앙집권적 문학관 건립 안 해
문학관ㆍ작가들 지원 역할하며
비수도권에 위치하는 게 맞을 듯
일반 시민들의 관심을 끌 일은 아니지만, 문학계 안팎의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현안이 생겼다. 국립한국문학관을 세우는 일이다. 국가가 나서서 하는 일이 대개 그렇듯이, 이 ‘사업’에도 수백억이 투입되는 돈줄을 잡으려는 각 지역의 열띤 경쟁이 벌어진다. 그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부작용을 우려해서 문화부가 추진절차를 잠정 중단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런 문제를 미리 내다보지 못하고 공모를 진행한 당국이나 무조건 돈을 받아오자고 공모에 응모했던 각 지역단체나 부끄럽게 되었다. 냉소적으로 들리겠지만, 언제 각 지역이 한국문학계에 이렇게 열광적인 관심을 보였던 적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공모에 응모한 시군구 단체들은 자기 지역이 문학관 입지로 선정되어야 할 이유를 강하게 주장했다. 공공기관만이 아니라 그 지역의 언론, 문학인들도 다양한 근거를 내세우면서 수백억짜리 국가사업을 유치하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언론이나 점잖은 지역문인들이 노골적으로 ‘돈’의 문제를 내세우지는 않는다. 다들 고상한 문화 정치적 논리를 내세운다. 하지만 솔직한 속내는 수백억의 재정을 끌어와 지역경제 ‘활성화’를 하겠다는 것이다. ‘한국문학’이 아니라 그에 딸려오는 돈이 관심사다. 그래서 주요 문학단체들이 내세운 주장조차 선선히 들리지는 않는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위치 선정에 지역 안배 등 정치 논리가 개입돼선 안 되며 공간의 상징성, 미래 확장성, 접근성, 국제 교류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런 주장이 사실상 특정지역을 추천한 것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특정 지역을 지지하는 것은 공식 입장이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하지만 “상징성, 확장성, 접근성, 교류가능성”에 가장 근접한 지역이 어디인지가 자명한 이상, 궁색한 변명이다. 이제 공모가 중단되고 아마도 정부 자체 심의를 통해 입지를 정하게 되면, 이런 식의 궁색한 변명의 실체가 무엇인지 드러날 것이다.
제한된 지면에서 공모를 둘러싼 여러 입장을 일일이 따져볼 수는 없다. 다만, 이런 논의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느끼는 불편한 점들을 적어둔다. 작년에 기회가 닿아서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존 스타인벡 기념관(John Steinbeck National Center)을 방문했다. 한국에서는 ‘분노의 포도’로 유명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스타인벡의 고향인 살리나스에 자리한 기념관은 국립이지만, 작가의 지역성을 철저히 존중해서 만들어졌고 운영된다. 같은 도시에 있는 그의 생가도 마찬가지다. 역시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오닐 기념관(Eugene O'Neill National Historic Site)도 국가의 재정적 도움을 얼마간 받지만 작가가 창작활동을 했던 독특한 지역적 배경을 고려한 기념관이다. 작가들의 고향이었고, 글쓰기를 했던 곳에 개별 작가의 기념관을 세운다. 미국 동부지역을 가더라도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인 에머슨, 호손, 멜빌, 트웨인, 소로 등을 기리는 유적지나 기념관이 있지만, 그 규모는 거창하지 않으며, 작가와 작품의 지역성과 관련된 곳에 위치한다. 유럽의 경우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최근 영국에서는 소설가 D.H. 로렌스 기념관이 문을 닫는다는 기사가 나왔다. 영국 같은 문화강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 놀랍지만, 이런 재정적 어려움을 국가나 지역 행정기관에 일방적으로 의지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작가 기념관들이 국가 곳곳에 산재해 있어도 그것을 인위적으로 한 곳에 모으는 일은 하지 않는다. 예컨대 셰익스피어 기념관의 경우 국립도서관, 옥스퍼드 대학,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 등의 대학과 문화단체가 후원을 하지만, 국가나 지방단체의 별도 행정기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민간중심의 셰익스피어재단을 만들어서 입장료, 기부금, 후원금 등으로 운영한다. 여기에는 문학과 문화의 자율성은 어떤 형태로든 국가가 개입하면 흔들리게 된다는 우려가 깔려 있다. 프랑스의 경우에도 국가 차원에서 중앙집권적인 문학관을 세워서 문학 유산을 한 곳에 모으는 일은 하지 않는다. 파리에 있는 문학 기념관의 경우에도 기본적으로 작가기념관(발자크, 위고 등)이며, 이들은 시의 후원도 받지만, 영국과 마찬가지로 입장권 수입, 후원금, 기부에 상당 부분 의존한다.
국립한국문학관의 설립취지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못한 한국문학의 자료를 한곳에 모아서 보관하고, 이를 활용해 한국문학의 진흥을 꾀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지금까지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그 지역이 낳은 작가들의 문학적 기념물과 유산(생가, 생활공간, 집필지 등)과 원고, 유고 등을 힘써서 관리하는 데 열과 성을 다하지 않았다. 그 결과 삶의 자취가 스민 창작의 공간은 경제논리에 따라 파괴되고 사라졌다. 그들이 남긴 글쓰기의 흔적들도 더불어 자취도 없이 사라진 경우가 많다. 상황이 이렇기에 작가들의 자료와 유품의 체계적인 집적과 정리를 위한 국립문학관 건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중국, 일본, 대만 등도 국립문학관을 갖고 있다는 국가주의적 경쟁논리를 내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각 작가들의 삶의 체취가 새겨진 공간과 글쓰기의 흔적은 모두 박멸시킨 채 웅장하게 건립된 한국문학관에는 어떤 자료들을 모을 것인가. 그 공간에서 탈색되는 작가들의 지역적 특색은 어쩔 것인가. 그리고 미국과 유럽처럼 개별 작가의 지역성을 존중하는 기념관을 세우지 않고, 중앙집권적인 문학관을 건립하면 어느 작가를 그곳에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쟁점이 발생한다. 누가, 어떤 기준에 의해서, ‘한국문학관’이라는 전당에 입성할 자격을 얻는가. 이 어려운 문제가 단지 문학적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한국문학사의 일그러진 궤적은 입증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궁금하다.
몇 가지 제안을 한다. 첫째, 모든 물질적, 정신적 자원이 중앙으로만 집중되는 ‘서울공화국’에서 한국문학 진흥의 중심 역할을 할 수밖에 없게 된 국립한국문학관은 비수도권 지역에 위치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것은 주요문학단체들이 내세운, 공간의 “상징성, 확장성, 접근성, 교류가능성”보다 더 중요한 가치, 문화의 균형발전과 편재성의 원칙에 근거한 제안이다. 둘째, 국립문학관을 특정 지역에 둘 수밖에 없다면, 그곳으로 모든 자원을 몰아주는 중앙집중식이 아니라 각 지역의 기념관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도록 해야 한다. 각 지역의 작가기념관, 지역문학관을 한국문학관의 지역 센터로 자리매김하고, 국립한국문학관은 그 센터들을 지원하는 역할로 위상을 설정해야 한다. 물론 필요한 경우 국립문학관이 각 지역 센터들이 감당할 수 없는 자료의 아카이브 역할을 할 수 있다. 핵심은 건강한 한국문학 생태계의 확보에 바람직한 방향이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셋째, 한국문학관은 죽은 작가들을 ‘명예의 전당’에 모시는 역할에 그쳐서는 안 된다. 지금 활동하는 작가들을 지원하는 작업을 동시에 해야 한다. 그런데 창작지원금, 문예지 발간지원금, 공공도서관의 문학도서 구입비 축소나 폐지가 벌어지는 게 현실이다. 한국문학의 이론적, 논리적 토대를 이루는 학술서와 연구서는 공공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에서조차 구입해주지 않아서 발간의 어려움을 겪는다. 그 결과 독자들은 한국문학을 외면한다. 현실의 한국문학 생태계는 뿌리부터 메말라간다. 이런 현실을 외면하면서 거창한 한국문학관을 짓는다고, 그리고 겉치레 행사를 한다고 한국문학이 부흥하길 바란다면 곤란하다.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문학(관)은 과거의 작가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아니다. 문학적 “기념비는 과거에 일어난 어떤 사건을 기념하거나 축하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에 신체성을 부여하는 지속적인 감각들을 미래의 귀에 들려주는 것이다.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인간의 고통, 다시 시작되는 인간의 항거, 가차 없이 재개되는 투쟁을”(들뢰즈). 국립한국문학관이 또 다른 돈 잔치, 빛 좋은 개살구가 되지 않으려면 새겨야 할 조언이다.
오길영 (충남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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