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훈 기자는 남성 라이프스타일 매거진 ‘아레나’의 피처 디렉터였다. 그게 뭐냐고 되묻는다면 남자의 모든 관심사를 다루는 잡지에서 삶의 기준을 세우는 해설을 맡은 팀장이었다는 얘기다. 사실과 현상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스트레이트 기사와 달리 피처 기사는 사건의 이면이나 인물의 속내, 풍경을 세밀하게 분석하는 스케치를 그려내는 글이다. 자연스레 피처 기사의 필체 뒤에는 감동과 미담, 화제가 뒤따르기 마련이고, 피처 기자는 그 중심에 선 주인공을 제대로 풀어내는 역을 맡는다. 김종훈 기자는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섬세한 피처 기자다. 가수 현아의 ‘패왕색’ 면모를 그려낸 인터뷰, 배우 차승원의 ‘섬세한 마초’ 같은 모순된 기질을 제대로 포착한 기사가 아직까지 떠오른다.
그러던 그가 불쑥 사표를 내고 대륙횡단에 도전했다. 사실 그의 모터사이클 입문 과정부터 옆에서 지켜봤던 터라 “러시아와 몽골을 거쳐 서유럽과 유럽을 관통하는 유라시아 투어 대장정에 나서겠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농담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는 차곡차곡 준비를 하더니 불쑥 사랑하는 애마 ‘포데로사’를 몰고 동해로 향했다. 러시아로 떠나는 전날, 형제처럼 지내는 사내 여럿과 그를 아끼는 지인들의 환송을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반년에 이를 그의 여정은 앞으로 한국일보 모클의 여행기를 통해 만날 수 있다.
#평소 인터뷰어로 활약하다 이번에는 인터뷰이가 됐다. 기분이 어떤가?
군대 이등병 같은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가려 한다. 막상 블라디보스톡행 배에 오르니 그저 덤덤하다. 출발하기 전까지는 걱정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어서 블라디보스톡 항구에 내리면 칼이라도 맞을 듯한 공포감마저 엄습했다. 사지로 진격하는 돌격병의 마음이 이럴까? 실제 가보니 조금 시골 같은 유럽 같다. 블라디보스톡에서 한 이틀 고생하며 달리니 100분의 1쯤은 경험한 기분이어서 침착해졌다.
#지금 어디에 있는가?
블라디보스톡에서 약 800km 떨어진 하바롭스크란 도시에 있다. 이틀 동안 모터사이클을 혹사시켜서 흡기압 센서에 문제가 생겼다. 부품을 기다리며 하바롭스크 주민 체험을 실컷 하는 중이다. 하바롭스크는 거대한 공원에 도시를 세워놓은 듯 조경을 무척 잘해놓았다. 마치 동네주민처럼 산책해 하바롭스크의 상징인 아무르강(흑룡강)을 보고 다시 돌아온다. 본격적으로 달리기 전 체력 관리라고 해두자.
SNS에 올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봤다. 에피소드가 궁금하다.
캡틴 이고르와 함께 찍은 사진 말인가? 지금도 그 순간들을 생각하면 괜히 웃음이 나온다. 모터사이클을 통관하고 나오는 길에 이고르 일행을 만났다. 그들은 한국 투어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러니까 나와 같은 배를 타고 온 거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톡 GS클럽 회원들이다. 나 외에도 유라시아 횡단을 위해 같은 배를 탄 라이더 중 어떤 분의 모터사이클 체인에 문제가 있었는데 그들이 나서서 도와줬다.
그 인연으로 그들과 같이 저녁을 먹고 블라디보스톡 라이딩 명소를 밤늦도록 쏘다녔다. 게다가 그들은 다음 날 우리가 블라디보스톡 빠져나갈 때까지 외곽까지 함께 배웅해줬다. 그때 찍은 사진이다. 너무 고맙고 신기해서 한없이 웃음만 나왔다. ‘모든 바이커는 형제다’, 라는 러시아 바이커의 잠언을 실감했다.
#왜 하필이면 모터사이클, 왜 그것도 야마하 SR400인가?
자동차를 타고 유라시아 횡단하는 사람도 꽤 된다. 그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모터사이클 타고 횡단하는 일체감과는 비할 바 못될 거다. 자동차는 아무래도 격리된 공간으로 가는 길을 즐긴다. 자동차라는 공간 자체가 외부와 막아주지 않나. 하지만 모터사이클은 주변 공간과 격리할 공간이 없다. 그 길의 공기와 햇살,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비라도 내리면 그만큼 고되겠지만.
야마하 SR400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 클래식한 모터사이클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 사람들은 이런 모터사이클을 타고 횡단했겠지. 체 게바라에겐 낡은 노턴 모터사이클(포데로사)이 있던 것처럼, 내겐 ‘낡진 않았지만’ 클래식 모터사이클 SR400이 있다. 그림이 좋잖아?
#많은 이들이 세계일주를 꿈이라고 부른다. 운명처럼 다가온 유라시아 횡단, 그게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극한의 체험을 통해 자아를 찾아 성찰한다는 거창한 목표는 없다. 세상에 태어나 더 넓은 세계를 눈에 담고 싶은 단순한 이유가 더 크다. 이번에 성공하면 러시아부터 포르투갈까지 수많은 나라의 수많은 길을 눈에 담을 수 있잖나! 게다가 매뉴얼 모터사이클을 본격적으로 타면서 너무 즐거워서 긴 시간, 긴 길을 달리고 싶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포르투갈 로카곶까지, 동에서 서로 3만여 킬로미터라면 충분히 길지 않을까?
#모터사이클 위에서 맞이하는 러시아의 풍경은 어떤가?
아직 곰 꼬리털도 제대로 못 만져본 거리만 달려서 러시아의 풍경이라고 말하긴 힘들다. 단지 800여 킬로미터 달리고 난 소감이라면, 거대한 숲과 거대한 하늘, 거대한 구름이랄까. 곰이라도 나올 듯한 숲을 지나면 거대한 평원이 나온다. 그게 또 반복된다. 내 작은 모터사이클로 그 널찍한 풍경을 가로질러가니, 세상의 크기를 아주 조금 체감했다. 동에서 서로 달리면서 점점 풍경이 바뀐다고 하니 그 재미도 기대한다.
#아직도 혼자인가? 라이딩 버디가 생겼나?
배를 탈 때 나처럼 유라시아를 횡단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 분은 ‘이륜차 타고 세계여행’이라는 카페에서 서로 만난 분들이었다. 각자 길이 달랐지만 처음에는 함께 이동했다. 하지만 내 모터사이클의 배기량이 낮아 어느새 그들은 먼저 갔다. 물론 내 모터사이클이 고장 나 발이 묶인 탓이겠지만.
#무엇을 얻고자 하기 위함인가?
일상과 단절된 극적인 삶을 통해 예전 열정을 다시 얻었으면 좋겠다. 10년 넘게 잡지 에디터로 일하면서 스스로 마모됐다는 걸 깨달았다. 이번 여정이 몸은 힘들겠지만, 정신은 새로 구축하기에 제격일 듯하다. 매 순간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 뭐든 내게 줄 것이다.
#여정을 알 수 있는 SNS 주소를 알려달라.
인스타그램(www.instagram.com/a.roadshow)을 통해 틈틈이 여정을 기록할 예정이다. 이제 더 이상 기자가 아니기에 블로그나 각종 매체에 기고를 쓴다. 한국일보 모클에도 종종 새로운 소식을 전하겠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와서 보고 나서 꼭 유라시아 횡단이 아니더라도 가슴에 바람이 부는 경험을 하고픈 욕구가 생겼으면 좋겠다.
최민관 기자 edito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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