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최종태 회고전
교회미술 토착화 운동 선구자
불상에서 발견한 한국인의 미
예수와 성모상에 구현
미술관이 예수와 성모의 형상으로 가득 찼다. 한국의 교회미술 토착화 운동의 선구자인 조각가 최종태(83)의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리고 있다.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그가 남긴 조각, 파스텔화 판화 등 스케치를 겸한 평면작품을 모두 합쳐 200여 점이 한 자리에 모였다. 1일 전시장에서 만난 최종태는 “조각을 해 온 60년동안 초반 10년의 작품을 제외한 모든 작품이 여기 모였다”고 말했다.
최종태는 한국 화단의 거장인 장욱진과 조각가 김종영의 제자로, 젊은 시절에는 당시 유행하던 추상조각 작업도 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과 다른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찾아 헤맸다. 조각 ‘회향’으로 1970년 국전에 입상한 비용으로 100일 동안 세계를 돌았지만 결국 그가 찾은 자신만의 아름다움은 ‘한국적인 미의 부활’이었다. “세계 여행을 마치고 나서 경주 석굴암 본존불을 볼 일이 있었는데 그 아름다움에 매료됐죠. 한국인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모습의 표본이 옛 불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종태는 불상에서 발견한 한국인의 미를 예수와 성모상에 구현했다. 1973년 서울 양화진성당 절두산 성지에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을 세우며 성상작업을 시작한 그는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여러 성당과 성지에 성상을 만들었다. 최종태의 성모와 아기예수는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꼭 닮았다. 두 손을 펼쳐 내밀고 있는 ‘기도하는 사람’의 자세 역시 모티브를 불상에서 가져온 것이다. 최종태는 “원래 예술과 종교는 하나였고 나 역시 종교와 예술이 하나가 되는 것을 추구한다”며 “특정 성당을 위한 작업이 아니라, 제 예술의 투영이라는 생각으로 성상을 만들었다”고 했다.
천주교 성상에 불상의 모습을 도입하는 데 반발도 있었을 법하다. “물론 많이 싸웠죠. 1964년 교황청에서 ‘토착 문화에 적응하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야기가 한국에 통하기 시작한 게 1980년대였어요. 꼭 20년이 걸렸어요.” 최종태의 활동을 시작으로 한국의 천주교 성상은 서구 양식 답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90년대부터는 천주교 춘천교구장인 장익(82) 주교와의 인연으로 동료 미술작가들과 함께 ‘한국 교회미술 새롭게 하기’사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는 기독교 신자다. 그러니 2000년 성북동 길상사 관음보살상을 깎은 게 이례적이다. 그에게 조각을 부탁한 것은 당시 길상사에 머물던 법정 스님이다. “법정 스님이 아니었더라면 하지 못했을 일이죠. 하지만 마무리되고 나니 (기독교와 불교) 양쪽에서 모두 좋게 생각해 주더군요.” 그는 “불교도 기독교도 모두 결국 선한 인간을 추구하는, 가치 높은 가르침으로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종태는 최근까지도 ‘한국의 미’를 찾고 있다. 2010년대에는 나무 조각에 파스텔을 색칠하는 채색조각에 도전했다. “최근에 만든 조각은 색을 칠해 놓고 보니 녹의홍상(綠衣紅裳ㆍ푸른 치마 붉은 저고리)이어서, 역시 내 작품은 한국적 미로 귀결되는구나 생각했어요.”
거대한 ‘회고전’을 벌이는 소감을 묻자 그는 “60년 중 30년은 배우는 과정이었고, 나머지 30년은 그 배운 것을 소화하는 과정이었다”고 회고하면서 “예술가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데 내가 나만의 목소리를 찾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글ㆍ사진 인현우기자 inhy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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