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인 제임스 오펜하임이 1911년 발표한 시 ‘빵과 장미’에는 “몸도 마음도 모두 굶주린다네. 우리에게 빵을 달라, 장미도 달라”는 구절이 나온다. 시에서 빵은 일할 권리를, 장미는 인간답게 살 권리를 뜻한다. 오펜하임의 시는 3년 전인 1908년 3월 8일 뉴욕 럿거스 광장 시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날 광장에 모인 여성 섬유 노동자 1만 5,000여명이 “생계를 위해 일할 권리도 원하지만 인간답게 살 권리 또한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오펜하임은 이를 빵과 장미로 표현했다.
▦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의 여성 노동자들은 1912년 파업을 하면서 “우리는 빵을 원한다, 장미도 원한다”를 구호로 사용했다. 그 때문에 로렌스 파업을 ‘빵과 장미’ 파업으로 부른다. 실제 20세기 초 미국 여성 노동자는 먼지 가득한 공장에서 하루 12~14시간 일하면서도 저임금에 시달리는 등 고통이 많았다. 그런 점에서 노조 설립의 자유와 여성 참정권 등을 요구한 럿거스 광장 집회는 여성 노동 운동의 이정표라 할 만하다. 3월 8일이 세계여성의날로 정해지고 빵과 장미가 그 상징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 초창기에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적 색채가 있던 세계여성의날은 1975년 유엔의 공식 지정 이후 모두의 기념일이 됐다. 한국에서도 8일 여러 행사가 열렸는데 그중 눈에 띈 것은 ‘3시 스톱’이었다. 한국의 여성은 임금이 남성의 64%에 불과하기 때문에 오후 3시부터는 사실상 무급으로 일하고 있다는 점을 알리고자 오후 3시에 퇴근하자는 행사다. 임금 차별뿐 아니라 승진 차별, 육아 부담 그리고 터무니없는 혐오 등 한국 여성의 고통은 한둘이 아니다. 현실이 이러니 페미니즘 열풍이 거셀 수밖에 없을 것이다.
▦ 그렇지만 박근혜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나온 발언을 접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대통령 변호인단의 김평우 변호사는 “헌재가 약한 여자 편드는 게 아니라 국회를 편든다”며 ‘약한 여자’론으로 대통령을 감싸려 했다. 최금숙 여성단체협의회 회장은 탄핵 반대 집회의 무대에 올라 “여성 대통령 탄핵 과정에서 여성 비하, 여성 혐오 등이 퍼지는 것을 우려한다”고 했다. 대통령의 잘잘못을 따지기보다 그가 약한 여자이기 때문에 피해를 본다는 뜻이라면 차별과 불평등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세계여성의날의 정신과 맞지 않는 것 같다.
박광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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