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역 참사는 생명과 안전의 포기 때문
하청 및 비정규직 문제도 함께 풀어야
경제정책의 대전환 없으면 재발 가능성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작업을 하던 열 아홉 살 청년이 숨지자 최강욱 변호사는 “20대 국회의원의 임기가 시작된 날, 동그라니 남겨진 컵라면과 숟가락 사진에 목이 메인다”며 팽목항의 운동화를 떠올렸다.
전남 진도의 팽목항은 2년 전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올랐던 세월호가 침몰해 단원고 학생들이 목숨을 잃은 참사의 현장이다. 그때 희생된 학생들은 구의역 청년과 나이가 같으니 살아있었다면 청년처럼 올해 초 학교를 졸업했을 것이다. 학생들과 청년은 죽음의 경로는 달라도 또래이기 때문에 생각도, 행동도, 꿈도 비슷했을 터이다.
비극적 두 죽음 사이에 또 다른 죽음이 있다. 가습기 살균제에 의한 죽음이다. 시작은 세월호보다 앞서지만 부끄럽게도 우리는 얼마 전부터야 눈길을 주고 있다. 살균제 희생자 중에는 세월호 학생이나 구의역 청년보다 어린 아이가 많다. 소년과 청년이 꿈도 펼치지 못한 채 떠나가는 나라에서 우리는 지금 버젓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세 죽음에는 효율이니 합리화니 하는 단어로 위장한 한국식 자본주의가 숨어 있다. 이윤을 위해 생명과 안전쯤은 가볍게 팽개치는 비정한 경제다. 그러니 이 셋을 우연히 일어난 별개 사건이라고 볼 수는 없다. 많은 사람이 이미 살균제 사건을 ‘안방의 세월호’로, 구의역 참사를 ‘일터의 세월호’로 부르고 있다. 겉만 조금씩 달리하면서 세월호 참사가 다시 일어나는 것 같다.
독일 카셀대학의 김덕영 교수는 한국이 경제규모 세계 10위권이 된 21세기에도 전근대적 참사를 겪는 것은 경제성장에 집착한 근대화와, 성장이데올로기의 지배로 인한 인간 존엄의 포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그런 사회를 만드는 데 정부가 앞장을 섰다. 큰 재난이 터져도 성장지상주의를 의심하지 않았고 자본의 이익을 우선시했다. 낡은 세월호의 개조와 과다적재에 눈 감고, 살균제의 위험에 눈길 한번 주지 않았으며, 힘 없는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마침내 생명과 안전마저 비용의 문제로 환산해 청년의 죽음을 초래했다.
청년은 하청업체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이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하청과 비정규직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의 기업에는 불공정 위계가 있어 일감을 준 원청업체는 큰 초과이익을 챙기고 다단계 구조의 하부 하청업체는 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등 불이익을 겪는다.
비정규직은 고용 불안, 낮은 임금, 위험한 환경에서 늘 불안하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는 파견법 개정에 목을 매고 있다. 파견법을 한국 경제의 구세주처럼 여기지만 파견 노동자나 하청 노동자나 다 같은 비정규직일 뿐이다. 이 법이 개정되면 비정규직이 늘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데도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것은 경제와 노동에 대한 허술한 인식을 반영한다. 구의역 청년의 죽음과, 무더기로 잘려나가는 조선 산업 하청 노동자를 보면서도 정규직 일자리 하나 없애고 비정규직 일자리 두 개 만들어 고용률 높이겠다고 다짐할 것은 못 된다.
외환위기 당시 한국에 돈을 빌려주며 고용유연화를 포함한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강요했던 국제통화기금(IMF)조차 신자유주의 정책이 낳은 불평등을 반성하고 있다. 비정규직의 양산이 한국의 불평등 확대에 중요한 원인인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얼마 전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국가성장률 0.1% 포인트, 0.2% 포인트 차이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도 “수치(달성)에 총력을 기울이기보다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데 초점을 두겠다”고 했다. 성장과 고용을 위한 노력을 등한시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삶의질 향상을 포함한 정책의 대전환을 의미한다면 경청할 만하다. 경제의 대전환을 이루자면 성장지상주의, 특히 노동의 약화와 통제로 기업 이윤을 보장하는 전략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수다. 적어도 자본의 이익을 위해 국가가 총동원되고 그 과정에서 소년과 청년이 죽어가는 그런 세상은 없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또 다른 세월호를 목격할 가능성이 높다.
/박광희 논설위원 kh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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