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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 내려놓으니 수가 보이더라"

입력
2015.01.04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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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 '김지석 시대' 예감, 삼성화재배 안아 세계대회 첫 우승

중2 때 입단한 바둑신동 "천적 박정환 9단 덕 봤다"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만난 김지석 9단이 지난해 12월 삼성화재배 월드마스터스 대회 결승 1국 기보를 복기하고 있다. 뒤편에는 결승 2국 초반 상황을 복기한 바둑판이 보인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만난 김지석 9단이 지난해 12월 삼성화재배 월드마스터스 대회 결승 1국 기보를 복기하고 있다. 뒤편에는 결승 2국 초반 상황을 복기한 바둑판이 보인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2013년 이세돌 9단은 “김지석의 나이 25세 되는 해 바둑이 원숙해지고 날개를 펼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의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25세 끝자락에 선 지난해 12월 김지석 9단은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 결승전에서 생애 최초로 세계대회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여세를 몰아 그 해 바둑대상 MVP로 선정됐다. 이 역시 생애 첫 수상이었다. 그만큼 2014년은 김9단의 바둑 인생에 변곡점이 된 해였다. 한 해 동안 세계대회에서만 16승 1패의 성적을 거둔 그를 가리켜 바둑계에서는 ‘김지석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올 정도다.

최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만난 김 9단은 승부사답지 않은 수줍은 웃음, 안경 너머로 보이는 선한 눈빛, 그리고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앳된 외모로 기자를 반겼다. 순진한 청년 같은 외모에 속을(?) 뻔했지만, 기자의 질문을 곱씹어 조곤조곤 대답을 이어가는 그의 모습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 바둑판 위에 돌을 놓는 승부사의 전형 그 자체였다. 내유외강 형 승부사 김지석 9단은 바둑보다 비디오게임이 좋았던 꼬마 시절부터 패배의 시련을 극복하기 시작한 최근의 모습까지 자신의 바둑 인생을 허심탄회하게 풀어냈다.

_어제(2014년 12월 19일) 바둑대상 MVP를 탔다.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은데?

“마냥 기뻤다. 개인적으로 처음 받은 MVP고, 또 세계대회 우승의 결과물이기도 하니까 기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_삼성화재배 우승이 MVP 수상에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은데 결승 상대, 우승 과정 등에 대해 설명해달라.

“결승 상대였던 탕웨이싱의 바둑 스타일은 다른 기사랑 좀 다르다. 노림수가 강한 스타일이다. 남들에게 없는 독특한 스타일이 있다.”

_결승 대국에서 고비는 없었나?

“있었다. 첫 판에서 꽤 유리한 형국으로 몰고 가서 중간에 거의 끝낼 수 있는 상황이 나왔다. 그때 방심하는 바람에 역전을 당할 뻔 했다. 143수에 흑이 잘 뒀으면 역전 당했을 수도 있다.”

_결과적으로는 2:0으로 상대를 꺾고 우승했다. 우승하고 나서 기분은?

“두 가지 의미에서 좋았다. 우선 개인적으로 세계대회 첫 우승이었다. 또 다른 면에서는 최근 2년간 한국 기사 중에 세계대회 우승자가 없었는데 이번 우승으로 한국 바둑이 건재함을 알린 것 같아 좋았다.”

_김 9단 말처럼 최근 중국 기사들의 강세에 한국 바둑이 밀리는 감이 있었다. 또 일본 바둑은 아예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한ㆍ중ㆍ일 바둑을 비교한다면?

“예전 중국 기사들은 공격적인 성향이었는데 요즘에는 그런 것이 없어졌다. 침착해지고 수를 꼼꼼히 읽는다. 일본은 교과서적이다. 실용적인 바둑을 두는 한국, 중국에 힘을 못 쓴다. 또 세계대회에서 기사마다 2~3시간씩 제한 시간을 두는데 일본 바둑은 아직도 기사 당 5~8시간으로 제한 시간이 길다. 결승 도전기 같은 경우 이틀에 걸쳐 두기도 한다. 세계대회 트렌드와 달라서 일본 바둑이 힘을 못 쓰는 것 같다.”

_모처럼 중국 기사를 꺾고 거둔 우승이라 바둑계 전체가 좋아했겠다.

“주위에서 축하 메시지를 많이 받았다. 개인전인데도 국가 대항전 같은 느낌을 받았다. 동료 기사들이나 한국기원 분들이 다들 자기 일처럼 챙겨줬다. 이 자리를 빌어 그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다시 전하고 싶다.”

_목진석 9단은 대회가 열린 중국까지 동행했다. 도움이 많이 됐는지?

“심리적으로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결승 상대가 정해진 후에는 다른 시합에 나가도 삼성화재배 결승이 계속 신경 쓰였다. 예전부터 결승을 앞두고 있으면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겨 오히려 오버페이스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 목 9단이 일상생활에서 승부를 잊고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많이 도와줬다. 목 9단과 바둑 외의 얘기를 많이 나누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_그 동안 국내 대회에서 이룬 성과와 달리 유독 세계대회와 인연이 없었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일단은 실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실력이 출중했다면 벌써 우승했겠지.(웃음) 또 다른 이유로는 아까 말했듯이 스스로 좀 유난을 떨었던 것이 심리에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예전에는 세계대회에서 8강, 4강에 올라가면 평소 같지 않게 왠지 더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 압박에 시달렸다. 한마디로 어깨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 그러다 정작 대국이 시작되면 어이 없는 실수를 하고, 수를 제대로 읽지 못한 적도 있었다.”

_변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결혼한 후 심적으로 안정된 게 많은 도움이 됐다. 또 패배에서 배운 점도 많다. 어깨에 과하게 힘이 들어간 상태에서 형편없이 지다 보니 이제 어떻게 지더라도 별로 두려울 게 없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웃음) 내려 놓고 바둑을 두니 오히려 좋은 결과를 얻게 된 것 같다.”

_바둑 입문 과정이 궁금하다.

“아버지께서 바둑을 좋아하셔서 두 살 위 형을 바둑학원에 보냈다. 그때가 아버지 직장 때문에 전남에서 살던 때인데 나도 같이 학원을 따라가면서 바둑과 인연을 맺었다. 다섯 살 즈음이었다.”

_본격적으로 바둑을 둔 건 서울에 올라와서부터인가?

“맞다. 8살 때 아버지는 전남에 남고 어머니, 형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면서 본격적으로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_서울에 올라와서 얼마 지나지 않아 조훈현 9단의 집에 들어갔다. 이창호 9단 이후 제자를 받지 않던 조 9단 집에 들어간 건 엄청난 행운이자 기회였을 텐데 열흘 만에 그 집에서 나왔다. 무슨 일이 있었나?

“그때가 열 살 때쯤이다. 사범님(조 9단)이 열흘 정도 생활하는 것을 보고 결정을 하자고 하셨다. 그런데 글쎄…(웃음) 당시에 사범님 댁은 어린 나에게 신세계였다. 최신 전자오락기도 있었고 몇 살 위 형, 누나(조 9단의 자녀들)가 나랑 잘 놀아줬다. 바둑판 앞에 앉아 있었던 기억이 없다.(웃음) 이창호 9단과 많이 비교됐을 거다. 결국 열흘을 채우지도 못하고 나오게 됐다.(웃음)”

_학교를 다니며 바둑을 뒀을 텐데, 바둑에 투자한 시간은 얼마나 되나?

“초중고 시절 거의 바둑에 올인했다고 보면 된다. 학교에서 편의를 봐 줘서 학교는 시험 때만 나가고 평소에는 바둑학원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아침 9시에 도장에 나가서 저녁 9시까지 바둑을 뒀다. 밤에 기숙사에 돌아와서도 친구들끼리 바둑 공부하고, 주말에는 기원에 나와서 연구생 생활을 했다.”

_바둑이 지겹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나?

“그런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그런데 나 때문에 가족들이 서울에 올라왔고, 부모님은 떨어져 사셔야 했다. 가족들이 많은 희생을 한 셈이다. 죄송해서라도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딱 한 번 그만두고 싶다고 얘기를 했더니 어머니가 몇 달 쉬어보라고 했다. 그런데 당시 권갑용 사단이 바로 “쓸데 없는 말 말고 바둑이나 두라”고 하셔서 바로 ‘깨갱’했다.(웃음)”

_학창 시절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

“물론 아쉬운 점이 있다. 지금도 후배들 바둑 두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안타까운 생각이 많이 든다.”

학창 시절 추억을 포기한 만큼 열매는 달았다. 김지석 9단은 중학교 2학년이었던 2003년 입단에 성공했다. 곧이어 농심 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에 국가대표로 나섰고 영남일보 소속으로 본격적인 프로기사의 첫 걸음을 뗐다. 하지만 주변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바둑신동은 정작 입단 후 3년이 지나도록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했다. 설상가상이라고 해야 할까. 2006년 박정환이 13살의 나이로 입단했다. 현 한국 바둑 랭킹 1위이자 김지석의 천적인 박정환은 중요한 길목마다 김 9단의 발목을 잡았다.

_박정환 9단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라이벌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느낌인가?

“사람들은 원래 라이벌 구도를 만들고 싶어하니까 박 9단과 비교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라이벌이라고 하면 그 친구가 싫어할 수도 있다.(웃음) 상대 전적에서 내가 훨씬 밀린다.(1월 현재 4승 14패)”

_박 9단에게 유독 패배가 많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얼마 전 국수전 도전기에서도 졌다.(웃음). 박 9단이 워낙 잘 두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름대로 변명을 해보자면 2009년 첫 대국에서 0대3으로 졌다. 후배에게 완패했다는 생각에 나름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그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웃음)”

_시합에서 의식하게 되지 않는지?

“예전에는 아무래도 후배에게 진다는 생각에 의식을 많이 했다. 하지만 요즘은 마음을 비워서인지 예전만큼 많이 의식하지 않는다. 일희일비 하지 않기로 했다. 좋아하는 후배와 승부를 즐긴다는 생각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박 9단이 있어서 내 바둑 실력도 많이 향상된 것 같다.”

_2월 LG배 결승에서 다시 맞붙는다. 이번 우승자는 2012년 이후 세계대회에서 2회 우승하는 유일한 기사가 된다. 부담은 없는지?

“아직까지는 아무 생각이 없다.(웃음) 박 9단과 즐겁게 승부를 펼쳐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_평소 박 9단과 친한가?

“친하다. 지난해 이세돌과 중국 바둑 영웅 구리가 중국을 돌면서 벌인 10번기 대결 때 박 9단을 꼬셔서 중국 청두에 놀러 간 적도 있다. 다만 이 친구는 바둑 외에는 아무 것에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같이 운동도 하고 놀러도 다니고 싶은데 그럴 기회가 없어서 아쉽다.”

_다른 친한 기사들은 또 누가 있나?

“두루두루 다 친한 편이다. 속 깊은 얘기를 할 정도의 기사를 꼽으라고 한다면 동갑인 강동윤 9단과 많이 친하다.”

김 9단은 어떤 질문을 던져도 대답을 회피하지 않았다. 기자의 부탁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사진 촬영을 위해 바둑판에 돌을 놓아달라고 하자 삼성화재배 결승 1ㆍ2국을 그대로 복기해주는 친절을 베풀기도 했다. 내친김에 지극히 사적인 질문 몇 개를 던졌다.

_2012년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한 재원과 결혼해 화제가 됐다. 아내와 어떻게 만났는지 궁금하다.

“결혼 전에 아내의 친구가 TV를 돌리다가 우연히 대국 중인 나를 봤다. 쑥스러운 얘기지만 그 친구가 나를 만나보고 싶어했다. 마침 아내가 어렸을 때 바둑을 배웠기 때문에 프로기사가 된 어린 시절 친구에게 그 얘기를 전달했다. 결국 나와 아내, 아내의 두 친구, 그렇게 넷이서 밥을 먹기로 했는데, 날 보고 싶다던 친구는 일이 생겨서 못 나오고 셋이 만났다. 아내가 마음에 들어서 그후 몇 번 더 만난 후에 나랑 교제해보지 않겠냐고 고백했다. 아내가 깜짝 놀랐다고 하더라.”

_아내가 세 살 연상이라는 점도 특이하다면 특이하다.

“그때는 동갑이나 누나들을 더 좋아하지 않나.(웃음)”

_시합에 아내를 동반하지 않는다. 혹시 남편의 승패를 지켜보는 게 가슴 졸여서 대국장에 안 오는 건가?

“꼭 그런 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아내가 나보다 더 승부사 같다. 내가 대국에서 이기든 지든 전혀 내색을 하지 않는다. 중요한 시합을 앞두고 신경이 날카로워져도 다 이해해준다. 대국장에 오지 않는 건 아마도 내가 신경 쓸까 봐 배려하는 것 같다.”

_2세 계획은 없나?

“여태껏 크게 노력하지 않았는데 올해 아이를 가져보려고 한다.”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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