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사진으로 보는 고난과 영광의 등정 [에베레스트 등정 40주년]

알림

사진으로 보는 고난과 영광의 등정 [에베레스트 등정 40주년]

입력
2017.09.15 04:40
0 0

1977년 오늘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의 고상돈 대원이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해발 8,848m) 정상에 올랐다. 대한민국은 세계 8번째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국가가 됐다.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시대에 이룬 쾌거였다. 결코 쉽지 않았던 고난의 등정 과정을 빛 바랜 사진으로 되돌아 본다.

고상돈 대원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 태극기를 높이 들고 있다.
고상돈 대원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 태극기를 높이 들고 있다.
사우스콜을 넘어 마지막 캠프로 향하는 고상돈 대원
사우스콜을 넘어 마지막 캠프로 향하는 고상돈 대원
고상돈 대원이 정상을 향해 마지막 힘을 내고 있다.
고상돈 대원이 정상을 향해 마지막 힘을 내고 있다.
“여기는 정상,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다” 베이스캠프에 정상 등정을 보고하고 있는 고상돈 대원.
“여기는 정상,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다” 베이스캠프에 정상 등정을 보고하고 있는 고상돈 대원.
베이스캠프의 원정대원들이 정상 등정 소식에 환호하고 있다.
베이스캠프의 원정대원들이 정상 등정 소식에 환호하고 있다.

#1 정상에 서다

붉은 등정복에 산소마스크를 쓴 고상돈 대원이 태극기를 높이 든 사진은 당시 함께 정상에 오른 셰르파 펨바 노르부가 촬영했다. 역사적인 순간을 담은 컬러필름은 도보와 항로를 통해 네팔 카트만두를 거쳐 인도 캘커타, 태국 방콕, 홍콩을 경유해 7일만에 서울 한국일보 본사로 수송됐다.

사진 속 고상돈 대원 앞쪽으로 1975년 중국 원정대가 세운 국기의 부러진 깃대와 셰르파의 것으로 보이는 배낭이 보인다. 당시 고상돈 대원은 1평 남짓한 정상에서 약 1시간가량 머물렀다.

#2 훈련 도중 대원 3명 사망

정상 정복의 영광 이전에 안타까운 사고도 있었다.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는 전문 산악인이라기보다 ‘동호인’에 가까웠다. 때문에 지리산과 설악산, 오대산 등지에서 특수훈련을 받으며 에베레스트의 극한 환경을 이겨낼 체력과 정신력을 키워야 했다. 그러던 중 1976년 설악산에서 발생한 눈사태로 인해 최수남, 송준송, 전재운 대원이 숨지고 말았다. 1년 후 세 대원들의 사진을 가슴에 품고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고상돈 대원은 그 곳에 그들의 사진을 묻었다.

에베레스트를 향한 첫 행군. 훈련대원들이 눈 덮인 지리산 칠선계곡으로 들어서고 있다.
에베레스트를 향한 첫 행군. 훈련대원들이 눈 덮인 지리산 칠선계곡으로 들어서고 있다.
1977년 대관령과 오대산 일원에서 진행된 4차 동계훈련.
1977년 대관령과 오대산 일원에서 진행된 4차 동계훈련.
원정대원들이 1976년 3차 동계훈련 도중 눈사태로 사망한 최수남, 송준송, 전재운 대원의 시신을 운구하고 있다.
원정대원들이 1976년 3차 동계훈련 도중 눈사태로 사망한 최수남, 송준송, 전재운 대원의 시신을 운구하고 있다.
고상돈 대원이 1976년 3차 동계훈련 당시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동료들의 사진을 에베레스트 정상에 묻고 있다.
고상돈 대원이 1976년 3차 동계훈련 당시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동료들의 사진을 에베레스트 정상에 묻고 있다.
장비 포장을 마친 원정대의 모습.
장비 포장을 마친 원정대의 모습.
에베레스트 정찰을 위해 아이스 폴 지대 6,200m를 오르는 대원들(1975년 10월).
에베레스트 정찰을 위해 아이스 폴 지대 6,200m를 오르는 대원들(1975년 10월).

#3 등정 준비

원정대가 공식 출범하기 전까지 준비작업도 만만치 않았다. 장비와 의류, 식량 등을 확보하기 위해 예산이 필요했고 수 차례 정찰 등정도 필요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원정대는 마침내 1977년 6월 16일 선발대 파견을 시작으로 100일간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4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오다

에베레스트 정상 1차 공격조는 실패했다. 박상열 부대장이 정상을 불과 100m 앞 둔 지점에서 탈진하고 만 것이다. 통신마저 두절된 상황에서 제5 캠프를 찾아내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오긴 했으나 이미 가져간 산소통을 다 써버린 후였다. 다행히 프랑스 원정대가 두고 간 산소통 12개를 발견한 덕분에 2차 공격조인 고상돈 대원이 정상 등정에 도전할 수 있었다.

에베레스트 1차 공격조는 정상을 98m(힐러리 스텝) 앞두고 심한 폭설과 산소부족으로 인해 C4까지 퇴각했다(1977년 9월 9일).
에베레스트 1차 공격조는 정상을 98m(힐러리 스텝) 앞두고 심한 폭설과 산소부족으로 인해 C4까지 퇴각했다(1977년 9월 9일).
죽음의 벽을 넘어 살아 돌아온 박상열 부대장.
죽음의 벽을 넘어 살아 돌아온 박상열 부대장.
원정대가 사다리를 이용해 크레바스를 넘고 있다.
원정대가 사다리를 이용해 크레바스를 넘고 있다.
사다리를 놓고 아이스 폴 지대를 통과하는 대원들.
사다리를 놓고 아이스 폴 지대를 통과하는 대원들.
에베레스트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아이스 폴. 큰 것은 폭이 4km, 깊이는 고층 빌딩만 한 것도 많다.
에베레스트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아이스 폴. 큰 것은 폭이 4km, 깊이는 고층 빌딩만 한 것도 많다.

#5 아이스 폴 이어진 고난의 길

당시 사우스콜을 경유해 남동릉 루트를 택한 원정대가 정상에 오르기 위해선 거대한 ‘아이스 폴(Ice fall) 지대를 통과해야 했다. ‘아이스 폴’이란 빙하가 산의 급경사면을 흘러내리거나 꺾일 때 갈라지면서 폭포와 비슷한 상태로 변하는 것을 말하는데 크고 작은 크레바스와 빙탑이 도처에 생겨 매우 위험한 난코스로 알려져 있다. 사진에서 보이는 사다리는 수백m 깊이의 크레바스를 건너기 위한 장비다.

#6 베이스캠프에서

최고봉이 바라다 보이는 베이스캠프에는 적막감이 흘렀다. 정상 정복과 무사귀환을 바라던 대원들은 함께 ‘아리랑’을 부르며 향수에 젖기도 했다.

#7 금의환향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에 성공한 원정대는 1977년 10월 6일 김포공항을 통해 개선했다. 설원의 태양에 그을린 얼굴과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 그대로 돌아온 원정대는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한국일보 자료사진•DB컨텐츠부

베이스캠프.
베이스캠프.
베이스캠프에서의 즐거운 한때. 대원과 셀파들이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베이스캠프에서의 즐거운 한때. 대원과 셀파들이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정상에서 하산한 고상돈 대원과 포옹을 나누는 원정대원들.
정상에서 하산한 고상돈 대원과 포옹을 나누는 원정대원들.
김포공항으로 통해 귀국한 정상의 얼굴들. 장하다는 시민들의 환호에 대원들은 손을 흔들어 답했다(1977년 10월 6일).
김포공항으로 통해 귀국한 정상의 얼굴들. 장하다는 시민들의 환호에 대원들은 손을 흔들어 답했다(1977년 10월 6일).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동반 취재한 한국일보 김운영(왼쪽), 이대영 특파원.
‘77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동반 취재한 한국일보 김운영(왼쪽), 이대영 특파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