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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9)스타로 가는 험난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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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9)스타로 가는 험난한 길

입력
2002.03.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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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힘든 일이 훨씬 많은 법이다.내가 이렇게 병이 든 것도 1960, 70년대를 힘겹게 살아오면서 그 고통을 잊기 위해 매일 마신 술 때문이다.

하루에 2갑 이상 피운 담배도 문제였지만 안주도 없이 막소주를 거침없이 마신 탓이 더 크다.

지금도 아내는 내가 이렇게 된 게 담배가 아니라 술 때문이라고 한다. 오죽했으면 당시 내 예명이 ‘주일(酒一)’이었을까.

베트남 위문공연을 갔다 오고 나서도 내 궁핍한 삶은 계속됐다. 베트남에서 명성은 얻었지만 귀국해보니 그 명성이란 게 기대에 못 미쳤던 것이다.

생활고가 다시 시작됐다. 상경한 어머니는 다짜고짜 “이 놈아, 정신 좀 차리고 월급 받는 회사 좀 다녀라”고 야단을 치셨다.

그래서 1972년 말 다시 찾은 곳이 경기 구리시 갈매동에 있던 캐비닛 공장이다. 내가 1992년 구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한 것은 바로 이 인연 때문이다.

공장 관리인으로 취직은 했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내 고질병인 노름 병 때문이었다.

거의 매일 밤 노름에 매달리다 보니 빚은 대추나무 연 걸리듯 늘어 5,600원이 됐다.

훗날 출마공약으로 “이 빚을 갚기 위해 구리에 왔습니다”를 내세웠던 만큼 이 금액은 지금도 기억한다.

어쨌든 큰 아들 창원(昌元)이의 도시락까지 못 사줄 정도로 어려웠고, 나는 거의 매일 술에 절어 살았다.

그러다 1973년 말 행운이 찾아왔는데 이번에는 얼굴이 문제였다.

이종건(李鍾健)씨의 소개로 서울 충무로의 최봉호(崔奉鎬)씨 사무실을 찾아간 어느날이었다.

당시 이씨는 최고의 쇼 흥행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최씨는 가수 하춘화(河春花)를 거느린 연예계의 대부였다.

나를 착하게 봤던 이 단장이 새 극장 쇼의 MC를 찾던 최씨에게 나를 추천한 것이다. 그러나 최씨는 단번에 딱지를 놓았다. “형님이나 써요. 저런 얼굴을 어떻게 무대에 세웁니까?”

결국 이씨는 가수 남 진(南 珍) 쇼로 눈을 돌렸다.

남 진 쇼를 이끌던 김영호(金瑛鎬) 단장이 최씨와 라이벌인 점을 노린 셈이다.

남 진 쇼의 사회자였던 김정남(金正男)씨도 나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무지 못생겼지만 한번 키워보겠다”고 말했다.

“너, 이젠 고생 끝이다. 최고 가수 남 진 쇼의 보조 MC를 맡게 됐으니 집에 가서 목욕부터 하고 내일 아침 오라”고까지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성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5시 서울시민회관 앞. 나는 목욕은 물론 양복까지 새로 맞춰 입고 김영호 단장을 기다렸다.

같이 기다리던 김정남씨는 “모든 게 잘 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거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 얼굴이 문제였다.

버스를 타고 나타난 김 단장이 나를 보더니 “이건 뭐야?”라고 딴지를 건 것이다. “우리 남 진 쇼를 뭐로 보고 이러느냐?”며 내게 발길질까지 했다.

비틀비틀 한참을 걸어간 나는 눈에 보이는 해장국 집에 들어갔다.

전날 아내에게 큰소리를 뻥뻥 쳤는데 어떻게 집에 들어가나.

소주 반 병을 시켜놓고 질질 짜고 있는데 가게 주인이 “아침부터 재수 없다”며 또 내쫓았다.

내가 유명해진 뒤에는 이 얼굴로도 영화 ‘얼굴이 아니고 마음입니다’나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에 출연할 수 있었지만, 무명 시절의 나는 그 ‘죄송한’ 얼굴 때문에 한도 설움도 참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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