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오니 살 것 같았다.다행히 아무도 내가 18일 저녁 제주도로 내려온 사실을 몰랐다.
정주영(鄭周永) 대표는 물론 나를 SBS로 납치해간 여당 관계자들도 몰랐다.
내가 그날 오후1시 서울 이태원 비바백화점에서 SBS ‘현장 쇼 주부만세’를 진행까지 했으니, 여당 측은 긴장을 풀었던 모양이다. 이제 후보등록 마감일인 3월10일까지 숨어 지내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다음날인 19일 저녁 건장한 청년 10여 명이 내 서귀포 별장을 찾아왔다.
그들은 “서울로 올라가시지요”라고 정중히 말했다. 정보기관 사람들이라고 직감했다. 다시 대충 짐을 싸고 그날 밤 거의 납치되다시피 또 서울로 올라갔다.
‘출마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왜 또 그러나? 이번에는 진짜로 출마하지 않을 건데….’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도착한 곳은 서울 종로구 청운동 정주영 대표 자택이었다. 우리 사이에서 ‘안가’라고 부르던 곳이다.
홍콩 출국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현대그룹 식구들을 총동원해 전국을 이 잡듯이 뒤진 것이다. 한편으로는 정 대표의 집착에 놀랐고, 또 한편으로는 친정 집에 온 듯 편안해졌다.
결국 3일 동안 ‘안가’에 머물면서 다시 출마를 결심했다. 정 대표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안가 앞뜰에서 현대그룹 전속 사진기사로부터 후보자 등록사진도 찍었고, 간단한 연설문도 만들었다.
출마용 포스터도 제작했다. 포스터에 들어간 간단한 공약사항은 정 대표가 직접 썼다.
출마에 필요한 각종 서류들도 꼬박 밤을 새며 준비했다. 내가 정 대표 안가에 있다는 것은 나와 정 대표와 측근만 아는 특급 비밀이었다.
출마할 지역구가 구리로 정해진 것도 이때다.
국민당은 이미 내가 구리에 출마할 경우 당선될 게 확실하다는 여론조사까지 해놓고 있었다.
당시 민자당과 민주당은 각각 237개, 207개 지역구에 대한 공천자를 발표한 상태였다.
구리에는 당시 현역 의원인 전용원(田瑢源) 민자당 후보, 총선에 4번째 도전하는 조정무(曺正茂) 민주당 후보가 출마하기로 돼 있었다.
3일이 지난 22일 오후 나는 몇몇 신문기자들을 만났다.
당시 진행을 맡고 있던 SBS ‘현장 쇼 주부만세’를 그만두겠다고 밝혔다.
“25일 녹화를 마치고 당분간 방송에 출연하지 않겠다. 아들 유품 정리도 할 겸 미국여행을 떠나겠다. 지난번 홍콩 나들이 때처럼 자의에 따라 이뤄진 일이다.”
물론 속마음을 숨긴 거짓말이었다.
여담이지만 이 사이 내게는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전에는 거리에서 아주머니들이 나를 보면 “저기, 이주일이 간다”며 낄낄거렸다. 그런데 내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다’ ‘안 한다’라는 얘기가 연일 신문에 대서특필되자 “마음 고생이 많지요? 용기를 가지세요”라고 위로해주기까지 했다.
그러면 나는 “코미디에서 27년 동안 공들여 쌓은 탑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며 출마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곤 했었다.
딸들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홍콩에 가기 전만 해도 “이민을 가자”고 조르던 딸들이 이제는 “딴따라 아버지를 뒀다고 손가락질 받은 한을 풀어야 한다”며 정치입문을 권유한 것이다.
특히 결혼을 서두르고 있었던 큰 딸 미숙(美淑ㆍ당시 28세)에게는 고위층 자제의 중매 제의까지 들어왔다. 정치란 게 뭔지….
“연예활동에 전념하겠다”며 언론에게 거짓말하기를 보름 여. 마침내 후보등록 마감 하루 전인 3월9일이 왔다. 국민당에서 신호를 보냈다. “이제 언론에 출마 의사를 밝혀라.”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