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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시스, 배철현의 비극 읽기] 정의란 분노가 아니라 중용이다

입력
2017.09.2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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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평범해 보이는 돌언덕 ‘아레오파고스’. 재판이 벌어지던 이 곳은 복수가 아니라 경청과 배려의 상징이 됐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돌언덕 ‘아레오파고스’. 재판이 벌어지던 이 곳은 복수가 아니라 경청과 배려의 상징이 됐다.

한 개인이나 국가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삶의 철학은 무엇인가? 몇몇 동서양 사상가들은 많은 사상들 가운데 ‘중용(中庸)’을 으뜸으로 뽑는다. ‘중용’이란 타인의 기준에서 보기에 괜찮고, 자신이 홀로 거울 앞에 서서 스스로 응시했을 때, 자신에게 감동적인 상태를 이르는 용어다.

고대 이스라엘에 그런 인물이 하나 있었다. ‘욥’이다. 기원전 4세기경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욥기’에서 무명의 저자는 욥을 ‘온전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고대 히브리어로 표현하자면 ‘톰 와-야사르(tom wa-yasar)’다. 히브리어 ‘톰(tom)’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평가할 때, 위대하다고 느낄 때 사용하는 단어다. 히브리어 ‘야사르(yasar)’는 남들이 보기에 도덕적으로 탁월한 사람을 지칭한다. 우리는 남의 눈을 속일 수는 있어도, 자신을 속일 수 없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는 수련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톰 와-야사르’라는 표현은 자신이 스스로에게 온전해야, 남들에게도 떳떳할 수 있다는 뜻이다.

중용이란 오래도록 갈고 닦은 삶의 기술

12세기 중국철학자 주자는 중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의 비위를 맞추어 비열하지 않은 것을 ‘중’이라 하고 바뀌지 않은 것을 ‘용’이라 한다. ‘중’은 천하의 바른 길이요, ‘용’은 천하의 정해진 이치다.” 주자의 해석도 욥기 저자의 해석과 유사하다.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명약관화한 바른 길, 즉 히브리어 ‘야사르’가 ‘중(中)’이며, 자신에게 떳떳한 상태(‘톰’)가 ‘용(庸)’이다.

중용의 삶은 서양 윤리의 근간이기도 하다. 기원전 4세기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쓴 도덕 교과서인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덕’을 두 극단의 중간으로 추정한다. 고대 그리스 신탁의 도시 델피에 다음과 같은 새김 글이 남겨져 있다. “무리하지 말라!” 고대 그리스어로는 ‘메덴 아간(meden agan)’이라고 새겨져 있고, 함축해서 번역하면 “어느 것도 과도하게 추구하지 말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금언을 발전시켰다. 그가 말하는 중용이란 산술적인 계산에 의해 도출된 정가운데가 아니다. 그 중심은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수련과 자신을 넘어서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얻어진 지혜를 통해 감을 잡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지혜를 그리스어로 ‘프로네시스(phronesis)’라고 불렀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중용을 실천하는 사람을 ‘삶의 대가’라고 불렀다. 자신의 삶을 최고의 예술로 완벽하게 승화하는 삶의 대가는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행위, 사건, 상황의 모호함과 불확실성 가운데 필요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요소들을 아름답게 연주하는 예술가다. 그는 매 순간에 가장 적정한 행동을 ‘연주’한다. 사람들은 그가 한 행동 외에 어떤 것도 더하거나 덜 것이 없다고 평가한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그 순간에 떳떳하게 행동한다. 인류는 이 중용을 개인의 차원을 넘어 한 공동체에서 실험하기 시작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는 이 중용을 ‘정의’라고 정의했고, 정의가 실천되는 공간인 법정을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아테네에 구축하기 시작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합의하라

아이스킬로스의 ‘자비로운 여신들’이란 비극은 아크로폴리스의 원형극장에 모인 아테네 시민들에게 ‘정의’는 분노가 아니라 숙고와 논쟁을 거쳐 합의된 ‘중용’이라고 가르친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이 생각하는 ‘정의(正義)’가 아무리 정의롭다고 자화자찬해도, 그것은 왜곡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신의 한정된 경험을 통해 세상을 보는 안경을 착용한다. 만일 그 안경이 붉다면 세상은 붉고, 그 안경이 파랗다면 세상은 파랗다. 교육이란 편견이란 색안경으로 대상을 보지 않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안경에서 색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오레스테스와 분노의 여신들은 아테네로 아테나 여신을 찾아와 자신들의 처지를 토로한다. 양쪽 주장을 모두 들은 아테나 여신은 말한다. “인간들이 심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 사건은 너무나 중대하다.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극심한 분노를 야기하게 될 이 사건을 심판할 권한이 나에게 없다... 나는 선서하되 결코 불의한 마음으로 선서를 여기지 않을 사건의 재판관들을 뽑을 것이고, 그러한 법규를 영원토록 확립할 것이다.”(‘자비로운 여신들’ 470-489행)

이전 인간들은 분쟁이 일어나면, 스스로 폭력을 사용하거나, 혹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권력자에게 달려가 재판을 부탁하였다. 혹은 신탁을 받는 사제를 통해 신의 판결을 받았다. 인간이 지닌, 생각하는 능력과 합의하려는 배려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고, 그것을 연습하지 않았다.

권력을 내려놓고 동등해지라

아테나는 새로운 문명의 문법을 제시한다. 아테나는 자신이 여신이라 할지라도, 그 권력을 내려놓고, 사건을 재판할 수 있는 공정한 재판관들을 뽑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판결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제도를 법으로 만들어 아테네라는 도시를 작동하게 만들 것이다. 아테나는 정의가 실현될 재판의 과정까지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녀는 오레스테스와 분노의 여신들에게 말한다. “그대들을 도와줄 조력자로서 증인과 증거를 모으도록 하시오. 나는 이 사건을 공정하게 심판하기 위해 내 시민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자들을 선임하여 돌아올 것이오.” (485-489행)

분노의 여신들은 자신의 삶을 규정할 새로운 원칙에 반대한다. 그들은 이 새로운 흐름이 자신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왔던 특권을 전복시킬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이 과정 중에 그들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분노의 여신들도 점차 도시 혹은 국가라는 공동체의 근간은 경청과 합의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의 변화된 마음을 노래한다. “신은 모든 일에 행하는데 중용에 힘을 실어주었다... 오만은 불경의 자식이다.”(529-535행)

분노의 여신들이 이제 아테네 여신을 도와주려 한다. 아니 아테네에서 탄생한 민주적인 문명을 위해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기 시작한다. 분노의 여신들은 ‘오레스테이아’ 3부작의 첫 두 비극 즉 ‘아가멤논’과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에서 합창대로 등장하여 인간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최선은 ‘복수라는 정의’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자비로운 여신들’에서 그들은 아테나 여신을 만난 후에, 그들의 정체성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만일 아테나가 어머니를 살해한 오레스테스를 풀어주면, 아테네는 무법과 폭력으로 가득한 야만의 세계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분노의 여신들의 역할이 아테네를 피로 물들게 할 수 밖에 없다. 아테나는 심사숙고한다. 자신이 어느 쪽으로 판결을 내려도 비극적이며 파국적인 결말을 맞이할 것이다.

아테나, 인류 최초의 재판을 열다

아테나는 이 비극적 선택을 모두를 위한 승리로 만들 혁신적인 가치가 있는지 고민한다. 아테나는 ‘법’이란 새로운 가치를 생각해낸다. 분노의 여신들은 이제 복수가 아니라 심사숙고와 중용의 과정이 정의가 되는 새로운 틀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 복수의 신전(神殿)이 아니라 ‘중용’을 보장하는 경청과 배려의 신전을 구축할 것이다. 분노의 여신들은 이 비극의 제목처럼 이제 ‘자비의 여신’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아테네 여신은 인류 최초의 재판을 나팔소리로 알리는 전령, ‘아레오파고스(Areopagus)’라고 불린 법정에 설 최초의 배심관 11명, 그리고 이 역사적인 광경을 지켜볼 수많은 백성들을 데리고 등장한다. 아레오파고스는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북서쪽에 웅장하게 노출된 거대한 바위를 이르는 용어다. ‘아레오파고스’는 고대 그리스어로 ‘아레이오스 파고스’ 즉 ‘전쟁의 신인 아레스의 바위’라는 의미다.

전설에 의하며 아레스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 할리로티우스를 살해한 사건을 재판한 장소다. 아레스는 할리로티우스가 자신의 딸인 알킵페를 강간했기에 살해를 한다. 아레오파고스는 기원전 5세기 이전 로마의 원로원처럼, 고대 그리스 귀족 출신들이 모든 사법적인 결정을 내리던 장소로 그리스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상징이었다.

솔론과 에피알테스의 개혁(기원전 462년)으로 아레오파고스는 민주주의를 실험하는 장소가 되었다. 기원전 458년에 무대에 올려진 ‘오레스테이아’는 바로 새롭게 태어난 아레오파고스에 대한 찬양이기도 하다. 아레오파고스는 문명사회를 구성한 민주시민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해 경청과 배려를 연습하는 공간이다. 경청과 배려의 과정이 바로 ‘중용’이다. 그 중용은 이 순간, 바로 여기에 가장 적정한 해결책을 찾아가는 ‘시중(時中)’이며, 자신을 깊이 응시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비워 혁신하는 ‘허(虛)’의 문화다.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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