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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대중선동 무혈혁명(소련공산당 74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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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대중선동 무혈혁명(소련공산당 74년:상)

입력
1991.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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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에게 토지를” 지지얻어/반볼셰비키파 쿠데타 실패로 소비예트 장악/첫 사회주의 정권 「마르크스 이상」과는 거리감1991년 8월29일 소련 최고회의의 활동정지 결의로 지난 1917년 10월 혁명으로 집권한이래 74년동안 국가권력 그 자체로 군림하였던 소련 공산당은 마침내 소련의 역사 무대에서 퇴장 당하고 말았다.

지난 19일 쿠데타가 있기 전까지만해도 소련 공산당은 비록 국민들로부터 배척받고 과거의 위세를 상실해가고는 있었다해도 최고 집권자인 대통령이 여전히 당수(서기장)로 있는 소련 최대의 정치세력이었다. 그러던 것이 열흘남짓한 사이에 사실상 불법화되고 재산을 몰수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것이다.

이러한 급전은 러시아 2월 혁명으로 제정이 붕괴했을때 지도자들의 망명,유형 등으로 여러 정치세력중 가장 취약했던 볼셰비키가 불과 8개월만에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현기증나는 부상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이다.

소련 공산당은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한 분파인 레닌이 지도하던 볼셰비키 당을 모태로 하고 있다.

러시아의 마르크시즘운동은 1883년 「러시아 마르크시즘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리고리·플레하노프가 망명지 제네바에서 세운 「노동해방그룹」에서 비롯된다.

플레하노프는 러시아 역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단계를 거쳐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단계로 넘어가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기본원칙에 충실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후진성과 시대의 흐름에 거역하는 제정의 반동적 태도는 보다 급진적인 이론을 낳고야 말았다.

플레하노프에 앞서서 피터·트카초프라는 사상가는 소수의 직업 혁명가들이 노동자의 전위대로서 음모적 지하정당을 조직해 국가의 중추적 기관을 강타함으로써 정권을 수립해야 하며,러시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사회주의에 도달할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플레하노프는 이러한 방식을 따른다면 사회주의 혁명은 소수 음모자의 독재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이를 배척했지만 플레하노프의 동료이자 제자격인 레닌은 내심 이를 지지했다.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두 흐름인 볼셰비즘과 멘셰비즘은 바로 이러한 노선차이에서 출발하는 것이었다.

전제정부의 지원하에 급속한 산업화가 추진되면서 러시아의 사회주의 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돼 1898년 민스크에서 마침내 러시아 사회민주 노동당이 창당하게 된다. 그러나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정당이 뚜렷한 지하조직체로서의 모습을 갖춘것은 1903년 런던·브뤼셀에서 열린 제2차 전당대회에서 부터이다.

또한 이 2차 전당대회에서 볼셰비즘과 멘셰비즘의 분열이 공식화 된다. 레닌은 이 전당대회에 앞선 1902년 3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소책자를 통해 볼셰비즘의 이론적 근거를 밝힌다.

레닌은 이 책에서 ▲소수의 직업적 혁명가들에 의한 음모적 지하정당의 조직 ▲엄격하게 중앙집권화된 상명하복적인 당 운영 ▲그러한 당의 지휘 아래서의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총파업을 통한 차리즘의 타도 ▲차리즘의 타도를 통한 유럽전역에서의 사회주의 혁명의 봉기 유도 곧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등을 제시했다.

레닌은 2차 당대회에서 자신이 이론을 당강령과 노선으로 공식 채택해 줄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좀더 광범한 동조자들의 참여에 기초한 민주적이며 공개적인 대중정당의 조직원칙을 제시하는 한편 ▲합법적인 방법 즉 의회와 노조를 통한 투쟁을 강조함과 아울러 ▲플레하노프가 제시한 2단계 혁명론을 제시했다.

두 세력의 대립은 격심했으나 결국 레닌이 승리했다. 레닌은 사회민주 노동당의 당수가 되자 자신의 파벌을 계속해서 다수파,곧 볼셰비키라 부르고 반대 파벌을 소수파,즉 멘셰비키라고 불렀다. 그는 즉시 당명을 「볼셰비키 러시아 사회민주 노동당」으로 바꾸었으며 1904년 11월에 볼셰비키만의 조직으로 「당 다수파의 위원회의 국」을 발족시켰다.

레닌의 지도하의 볼셰비키들은 볼셰비즘에 반대되는 여러 갈래의 사회주의 이론들에 맞서 싸워가며 1917년 10월 혁명의 성공으로 집권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노선의 바탕위에서 싸웠다. 1917년 2월 혁명이후 취약한 정치세력이었던 볼셰비키가 집권에 이르기까지는 레닌의 지도력이 절대적인 역할을 하였다.

17년 4월 독일군의 봉인 열차를 타고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역에 도착한 레닌은 『소비예트에 전권을,농민에게 토지를,즉각적인 평화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대중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선동적 구호는 전쟁수행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임시정부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입지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볼셰비키 세력의 대두에 위협을 느낀 코르닐로프 장군의 쿠데타 기도와 실패는 볼셰비키들에게 페트로그라드 소비예트를 장악하게 함으로써 집권가능성에 한발 더 다가서게 한다. 소비예트를 장악한 레닌은 무장봉기를 통해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권력을 획득하자고 주장했지만 강력한 내부 반발에 직면한다.

그러나 레닌은 혁명대중의 지지가 자신에 쏠리고 있음을 간파하고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동참하는 민주적 연립정부를 수립하자는 타협안을 거부하고 트로츠키의 협력하에 10월24일 밤 무혈 혁명을 성공시킨다.

이로써 탄생한 지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은 그러나 마르크스의 이상과 전반적인 사회주의 흐름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소련공산당이 볼셰비키 정당 혹은 마르크스 레닌주의 정당으로 불리는 소이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유동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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