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라제기의 시네마니아] 누구를 위한 크레딧인가

입력
2016.08.31 16:24
0 0
영화 '밀정'은 투자자 관련 크레딧을 간명하게 처리해 충무로의 눈길을 끌고 있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영화 '밀정'은 투자자 관련 크레딧을 간명하게 처리해 충무로의 눈길을 끌고 있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몇 년 전 프랑스 칸에서 있었던 일. 어느 한국영화 상영이 시작되자 관계자들은 들뜬 기분을 누르지 못했다. 투자배급사 리더 필름(회사 이미지를 나타내는 짧은 영상)이 스크린에 등장하자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제작사 이름이 스크린에서 명멸할 때도, 투자배급사 대표의 이름이 등장할 때도, 여러 투자사 명칭이 나타날 때도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영화제 중의 영화제라는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자사 관련 영화가 상영되는 것에 대한 벅찬 감정의 표현이었다. 이해 가능한 행동이었지만 조금은 민망했다. 해외 영화 관계자들은 자사 리더 필름이 나온다고 환호성을 지르지 않고, 무엇보다 투자 관계자들의 이름이 시시콜콜 영화 서두를 차지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한국영화를 보다 보면 관객으로서 거의 매번 마음이 불편하다. 영화 제작에 돈을 댄 사람들(알고 보면 자기 돈도 아니고 회사 돈이다)의 이름이 죽 나열 되는 모습 때문이다. 투자배급사 명칭이 따로 들어가고 그 회사의 대표가 투자책임이라는 직함으로 이름을 따로 올린다. 투자 실무 등 투자라는 수식이 붙는 일련의 업무에 참여한 사람들이 소개된 뒤에야 감독과 촬영감독 각본가 등 주요 스태프의 이름이나 주연 배우명이 떠오르기 일쑤다. 투자가 없으면 영화도 없으니 투자자를 우대해야겠지만 적어도 한국영화계 크레딧은 유난히 투자자 우선이다. 한 제작사 대표는 “외국처럼 투자 관계자들도 엔딩크레딧으로 처리해야 한다”며 “반드시 바꿔야 할 투자자들의 횡포”라고 비판한다.

7일 개봉하는 '밀정'의 도입부를 보고 조금은 놀랬다. 투자사인 미국 대형 스튜디오 워너브러더스의 리더 필름이 먼저 나온 뒤 한 화면에 공동 투자사 명단이 짧게 등장했다. 이어서 감독과 촬영 감독 등 주요 스태프의 이름이 나왔다. 여느 한국영화와는 다른 ‘간결’한 시작이었다. '밀정'의 관계자는 워너브러더스의 방침에 따른 결과라고 밝혔다.

내년 개봉을 목표로 한참 촬영 중인 ‘군함도’는 투자 관계자들의 이름을 영화 앞부분에서 구구절절 등장시키지 않을 예정이다. 스태프와 배우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류승완 감독의 신념이 반영됐다. 영화 관계자들은 ‘베테랑’(2015) 등 흥행작을 여럿 내놓은 류 감독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평가한다.

투자자들의 이름이 한국영화 서두를 대거 차지하기 시작한 때는 1990년대 후반이다.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면서 영화 제작 편수가 늘고 영화산업이 덩치를 키우면서 여러 투자자들이 충무로에 발을 디뎠다. 소액을 투자하는 사람들이라도 영화 앞부분에 자신들의 이름을 올려달라 요구하면 한 푼이 아쉬운 제작사는 들어줄 수 밖에. 한 두 사람 슬그머니 이름을 올리더니 이제는 투자 관계자 이름을 일일이 올리는 게 충무로만의 관행이 됐다.

영화는 여럿의 땀과 의지가 모여 만들어진다. 아무리 돈이 최고의 가치를 지닌 세상에 살고 있다 해도 투자자 업무가 무명 스태프나 단역 배우들의 노고보다 위에 있지는 않다. 평범한 관객은 무심코 지나가는 관행이라지만 불합리하다면 바꿔야 한다.

wender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