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직언 못하고 책임총리 어려워
공직기강 외쳐 봐야 손가락질당할 판
박근혜 정권에 두고두고 부담 될 것

이완구 총리는 후보 지명을 받고 “대통령에게 쓴소리와 직언을 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사청문회에서 청와대가 인사를 다 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자 “대통령에게 할 얘기를 못하는 총리는 있을 필요가 없다. 그만두겠다”고도 했다. 이 총리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어제 이 총리는 가까스로 표결에서 통과했다. 그러나 검증 과정을 통해 이미 만신창이가 됐다. 부도덕과 부적격이라는 낙인이 온 몸에 찍혔다.‘상처뿐인 영광’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스러울 정도다.
이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면목이 서지 않게 됐다. 중책을 맡길 테니 청문회만 통과하라고 했더니 겨우 목숨만 건져 돌아온 그가 무슨 낯으로 박 대통령을 보겠는가. 쓴소리는커녕 바닥에 엎드려 숨도 크게 못 쉬는 처지가 돼버렸다. 상처투성이인 자신을 내치지 않고 거두어준 윗사람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인간관계의 이치다.
안 그래도 배포가 두둑한 참모들도 레이저 한 방에 나가 떨어지는 판인데 형편없이 찌그러진 이 총리에게 직언이나 쓴소리가 가당하기나 한 소린가. 그 것도 평소에“각하”소리를 입에 달고 다니던 그가 아니던가.
책임총리도 진작에 물 건너갔다. 헌법에 보장된 국무위원 제청권과 각료 해임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하는 책임총리는 한국 같은 제왕적 대통령제에서는 매우 어려운 과제다. 역대정권에서도 그나마 김종필ㆍ이해찬 전 총리 정도가 근사치에 가까웠다. 박 대통령의 국정스타일로 볼 때 웬만해서는 권력을 누구에게 나눠주려 하지 않는다. 지지율이 곤두박질치고 민심이반이 위험 수위에 이르자 내키지 않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정치인을 어쩔 수 없이 앉혔을 뿐이다. 이런 마당에 책임총리를 하겠다는 사람이 제 스스로 날갯죽지를 부러뜨려 왔으니 다행도 이런 다행이 없다고 할 것이다.
이 총리에게 새누리당은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다.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에게 큰 절이라도 하고 싶을 게다. 이들이 조금이라도 딴 마음을 먹었다면 이 총리는 졸지에 야인으로 전락했을 뻔했으니 어찌 고맙지 않을까. 정부의 총사령관이 초장부터 당에 한풀 꺾이고 들어가야 할 판이니 앞으로 수없이 밀고당기기를 반복해야 하는 정부 입장에서는 보통 난감한 일이 아니다.
정부 내에서도 당장 실세 간의 힘겨루기 양상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잘 굴러갈 때는 이완구-최경환-황우여 체제가 트로이카를 구축해 활력을 띨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왕 장관’으로 불리는 최 경제부총리가 흠집이 잔뜩 난 이 총리에게 고분고분할 리가 없다. 5선에 당 대표를 지낸 황 사회부총리 역시 호락호락하게 보일 이유가 없다. 자칫 삼각협력체제가 아니라 견제와 갈등이 일상화할 소지가 다분하다.
수십 만 명의 공무원들을 어떻게 대할지도 궁금하다. 이 총리는 후보 지명을 받자 “무너진 공지기강을 확실히 잡겠다”고 큰소리쳤다. 도덕성과 정직성에 심각한 하자가 드러난 이 총리가 공직자들 앞에서 공직기강을 외친들 제대로 먹혀 들어갈 리가 만무하다.
무엇보다 언론과의 관계가 걱정스럽다. 기자들과의 대화 녹음파일을 통해 이 총리의 비뚤어진 언론관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방송사에 전화해 불리한 기사를 막았고 언론사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식의 발언도 했다. 언론인을 겁박한 것은 물론 심지어 희롱하고 모욕을 줬다. 권력으로 찍어 누르거나 적당히 회유하면 언제든 언론에 재갈을 물릴 수 있다는 이 총리의 천박한 언론관은 끔찍하다. 이런 잘못된 언론관이 언제 어느 상황에서 고개를 들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박 대통령으로서도 혹 떼려다 붙인 격이 됐다. 이 총리 임명으로 얻을 수 있는 기대효과는 사라지고 부담만 커졌다. 이런 사람을 총리 후보로 지목한 박 대통령의 사람 고르는 안목에 대한 불신은 더욱 높아졌다. 국민 신뢰에 금이 간 이 총리와 더불어 공무원 연금과 공직개혁 등 산적한 개혁과제를 어떻게 헤쳐나갈지도 걱정스러울 게다. 이 총리는 본인의 명예로 보나 나라의 앞날을 고려하더라도 차라리 되지 않은 게 나았을지 모른다. 이 나라는 이렇게 흠 없는 총리 감은 없는 것인지 참으로 답답하다.
논설위원 c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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