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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19)친구 박종환ㆍ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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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19)친구 박종환ㆍ上

입력
2002.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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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5~6월 한국일보 미주지사 초청으로 두 번째 미국ㆍ캐나다 순회 공연을 떠났을 때의 일이다.나와 가수 이은하 김연자 이 용 등 연예인 10여 명은 뉴욕 워싱턴 필라델피아 덴버 등을 돌며 동포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적어도 LA 공연 전까지는 말이다.

6월10일이었다. LA의 대형 공연장인 슈라인 오라토리움에서 잔뜩 기대를 갖고 공연을 했는데 최악의 결과가 나왔다.

공연장이 절반도 안 찼던 것이다. 이유를 알아보니 바로 다음날 멕시코에서 열리는 제4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8강전에서 우리 대표팀이 우루과이와 한판 붙기 때문이었다.

박종환(朴鍾煥ㆍ현 여자축구연맹 회장)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을 응원하기 위해 LA 동포들이 대거 현지로 날아간 것이다.

나도 LA 앰배서더 호텔에서 이 경기를 TV로 시청했다. 정말 극적인 승리였다. 2_1 승리로 4강 진출이 확정되는 순간 나는 펑펑 울었다.

박 감독이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면 나도 치켜들었고, 박 감독이 선수 등을 두드리면 나도 옆에 있던 사람들 등을 두드렸다.

그러면서도 내 눈앞에는 그와 보낸 배고프고 어려웠던 시절이 휙 휙 스쳐갔다.

참으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1960년 춘천고 축구부에서 그는 풀백으로, 나는 라이트 윙으로 뛰던 때다.

도시락도 제대로 싸오지 못한 우리는 주린 배를 움켜쥐며 점심시간에도 운동을 했다.

나는 그래도 아침 식사는 할 수 있었지만 박 감독은 아침마저 거르기 일쑤였다. 박 감독은 그 때 미군부대 사환 노릇을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어느 날이었다. 당시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나는 곧잘 데이트 신청을 받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언제나 먹을 거리가 제법 생겼다.

그날도 고기만두와 빵을 잔뜩 들고 박 감독 집에 찾아갔다.

“혼자 먹으려니 마음이 아파서….”

그러자 박 감독은 호통부터 쳤다.

“볼 차는 녀석이 여자나 가까이 하면 되겠냐. 그렇잖아도 힘들어 죽겠는데 여자까지 알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고교 졸업 후 우리는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그는 축구명문 신흥대(현 경희대)로, 나는 군예대로 서로의 갈 길을 갔다.

다만 그가 대학을 다니면서도 도시락 대신 누룽지로 배를 채운다는 소식만 들었다.

그러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게 1966년 겨울 서울 광화문 근처에서 열린 재경 춘천고 동문 모임에서였다.

당시 나는 지방극단을 좇아 다니는 3류 연예인, 박 감독은 대한석탄공사 축구팀의 갓 부임한 코치였다.

우리는 포장마차로 자리를 옮겼다. 꽁치 한 마리를 굽고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야, 배고파 딴따라 짓 못하겠다.”

그러면서 그 동안 고생한 이야기를 들려줄 참이었다. 그런데 그가 또 야단을 쳤다.

“이 자식이, 운동선수는 뭐 별 볼일 있는 줄 알아? 어차피 나선 길이니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야 할 것 아냐?”

밤이 이슥해서야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 술값을 내겠다고 한참 고집을 피우다가 결국 그가 냈다.

“야, 종환아. 내가 나중에 스타가 되면 근사하게 한 잔 살게.” 이 약속은 20년 가까이 지나서야 지킬 수 있었다.

LA 앰배서더 호텔에서 우루과이전을 본 그날 밤 나는 박 감독에게 전화를 했다.

“귀국하면 한 잔 산다.” 그리고는 귀국하자마자 그에게 당시 인기 승용차였던 스텔라 한대를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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