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는 공원마다 인파가 몰린다. 누구나 설레는 봄볕 아래 외출, 그러나 몸이 불편한 장애인에겐 고난과 역경의 연속일 뿐이다. 특히 전동휠체어를 탄 중증 장애인에게 대중교통을 이용한 이동은 모험에 가깝다. 부족한 장애인 편의시설을 찾아 헤매기 일쑤고 일부 이용객의 핀잔도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15일과 18일 뇌병변 1급 장애를 가진 황인현(48)씨의 고생스런 외출을 동행했다.
09:00 출발
15일 오전 전동휠체어에 몸을 실은 황인현씨가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집을 나섰다. 첫 행선지는 지하철로 세 정거장 떨어진 보라매병원, 진료를 마치면 근처 공원에 들러 봄기운을 만끽한 후 광화문 광장에서 열리는 장애인 추모집회에 참가할 예정이다.
외출을 앞둔 황씨 머릿속엔 지름길 지도가 그려졌다.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지하철역 출입구까지의 최단 코스부터 횡단보도 개수, 도착역 엘리베이터와 가장 가까운 승강구 번호까지, 일반인에겐 그다지 필요 없는 정보를 황씨는 줄줄이 꿰었다.
진료 예약시간은 오전 10시15분, 병원까지 가는데 40분이면 족하지만 황씨는 마음이 급했다. 그는 “언제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니 항상 30분 일찍 움직인다”고 말했다. 순간 황씨의 전동휠체어가 차도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횡단보도와 보도 사이의 높은 턱과 구조물, 화분, 쓰레기통, 불법 주차 차량 등이 통행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몸에 충격을 주는 울퉁불퉁한 보도블록도 전동휠체어 고장의 주 원인이다.
09:20 장애인은 후 순위
지하철 2호선 신도림역에 도착한 황씨는 승강장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세 차례나 놓쳤다. 노인 몇 사람이 먼저 탑승하자 휠체어가 들어갈 공간이 사라졌고 늦게 줄을 선 사람들은 남은 공간을 파고 들었다. 황씨는 “휠체어가 엘리베이터 공간을 많이 차지하기 때문에 ‘불편한데 왜 나와서 다른 사람들 힘들게 만드냐’고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전동차에 탑승할 때도 황씨는 후 순위로 밀렸다. 장애인 승차 위치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뒤늦게 온 일반인들이 모두 올라탄 후에야 휠체어를 움직일 수 있었다. 야속하게도 황씨가 탑승하기도 전에 ‘열차 출입문 닫습니다’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09:40 마을버스는 꿈도 못 꾸고
세 정거장을 지나 신대방역에 도착했다. 병원까지는 약 1.5㎞, 마을버스로 5분 거리지만 황씨의 선택지에 마을버스는 없었다. 전동휠체어 탑승 설비를 갖춘 마을버스는 일부 지역에서만 시범 운행할 만큼 찾아보기 어렵다. 황씨는 병원까지 전동휠체어로 이동해 예약 시간을 겨우 맞췄다.
12:00 맛 보다 공간, 화장실은?
병원 진료를 마치니 어느덧 점심 시간. 황씨의 음식점 선택 기준은 맛보다는 휠체어 진입 가능 여부다. 덩치 큰 전동휠체어가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공간이 넉넉한 음식점을 찾는 데 10분 이상 흘렀다.
식사 후엔 화장실을 찾아 헤맸다. 겨우 찾아 들어간 장애인 화장실이 장애인 편의시설 대신 온갖 청소도구만 가득하거나 아예 출입문이 잠겨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일반 겸용 화장실을 발견했지만 출입문이 직각으로 꺾이고 폭이 좁아 휠체어 진입에 애를 먹었다.
13:30 위험한 승강장
보라매 공원에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찾은 신대방역. 승강장과 전동차 사이의 틈을 휠체어 앞 바퀴가 가까스로 건너면서 황씨 몸이 휘청거렸다. 자세히 보니 조금만 방향이 틀어져도 바퀴가 빠질 정도로 간격이 넓었다. 무턱대고 탑승하다 휠체어가 전복되는 사고를 종종 접한 황씨는 승강장과 열차 사이 간격이 넓은 역을 미리 파악하고 있다.
전동휠체어의 승하차를 위해 안전발판이 필수지만 이용하기가 쉽지 않다. 역무원에게 요청을 해야 가져다 주기 때문에 오래 걸리는 데다 아예 없는 역도 있다. 겨우 전동차에 올라도 내릴 땐 마땅한 방법이 없어 모험을 감행하거나 포기하고 만다. 역무원이 안전발판을 들고 하차역까지 동승하는 일본과 사뭇 다르다. 2015년 기준 서울시내 지하철 역사 중 전동차와 승강장 사이 간격이 10㎝ 이상인 경우는 110여곳에 달한다.
13:55 또다시 차도로
시청역에 도착한 황씨는 장애인 추모 기자회견이 열린 광화문광장을 향해 속도를 높였다. 병원 진료가 길어진 탓에 1시간가량이나 늦었지만 보행자로 붐비는 보도를 주행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선 휠체어 바퀴가 보행자의 발을 밟거나 다리와 부딪치는 일이 흔하다. 황씨는 “차도 주행이 위험한 줄 알지만 가해자가 되느니 차도에서 피해자가 되는 게 마음 편하다”며 보도를 벗어났다. 반대편에서 달려오는 오토바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장애 때문에 늦을 수도 있지’라는 시선을 벗어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버스 나들이
11:00 가뜩이나 부족한데 그마저도 고장
18일 황씨는 김포에 위치한 사무실에 들렀다 서울시청에서 열린 장애인 인권영화제를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이번엔 버스를 이용할 계획이다.
당산역 앞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황씨는 20분 만에 김포시청 방향 버스 2대를 보냈다. 일반 버스였기 때문이다. 5분 후 드디어 저상버스가 섰다. 황씨를 발견한 기사가 장애인 탑승용 슬라이드 발판을 작동시켰지만 고장이었다. 몇 차례 더 시도해 봤으나 꿈쩍하지 않았다. 당황한 기사에게 황씨는 “다음 차를 타면 된다”며 또다시 버스를 보냈다. 그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눈치를 주거나 욕설을 하는 승객들이 있어서 이럴 땐 버스를 보내는 게 속 편하다”고 말했다.
11:30 저상버스 타고 일단 김포까지
30분을 기다려 겨우 탔지만 기다리던 버스는 아니었다. 한 버스만 하염없이 기다리느니 비슷한 방향이면 일단 타고 환승 하는 편이 낫다. 황씨는 “저상버스 기다리다 시간초과로 환승 할인 혜택을 못 받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버스 내부도 휠체어의 방향을 못 틀 정도로 좁았다. 황씨는 이날 아슬아슬한 후진 하차 묘기를 보여 줬다.
12:10 끝내 사무실 행 포기, 이어지는 빗 속의 기다림
어찌어찌 김포까지는 왔으나 사무실 방향 버스는 오지 않았고 설상가상 비까지 내렸다. 대중교통 검색 앱을 확인해 보니 저상버스는 1시간 후에야 도착 예정이다. 장애인 콜택시를 불렀지만 “2시간 후에나 이용이 가능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황씨는 사무실 방문을 포기하고 서울시청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제법 굵어진 빗줄기에도 황씨는 지붕이 있는 정류소로 들어가지 않았다. 불과 몇 미터 안 되는 거리지만 버스를 발견하고 이동하는 사이 대부분의 버스가 떠나 버리기 때문이다. 비를 맞고 기다리기를 30여분, 황씨가 다가오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며 적극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버스에 오른 황씨는 “아무리 1시간 일찍 나와도 오늘처럼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열이면 아홉”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김주영기자 will@hankookilbo.com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권도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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