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지후 기자

등록 : 2018.01.08 21:21
수정 : 2018.01.09 08:45

"학교에 없어진 영어, 학원 찾아서..." 사교육 되레 키운다

등록 : 2018.01.08 21:21
수정 : 2018.01.09 08:45

#정부의 영어 억누르기 정책

초등 1,2 영어 교육 폐지 이어

방과후 교육도 올해부터 금지

유치원ㆍ어린이집까지 확대키로

#사교육 시장에도 ‘규제의 역설’

선행학습 금지시키자 학원 늘어

강남권 60%가 영어 유치원 진학

빈부 따라 어학능력 격차 커질 듯

게티이미지뱅크

“초등 1, 2학년 방과후 영어 수업 금지가 확정되면서 파닉스(단어의 소리ㆍ발음을 이해하는 것) 수업 관련 초등 저학년 문의가 정말 많아지고 있습니다.

빠른 마감이 예상되니 서두르시라고 미리 알려드려요.”

올해 아들을 초등학교에 입학시키는 김병모(40)씨는 최근 육아ㆍ교육정보를 자주 얻는 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살피다 착잡한 마음만 늘었다. 올해 새 학기부터 초등 1, 2학년을 대상으로 한 방과후 영어가 폐지되면서 영어학원을 알아보는 학부모들이 예상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8일 “방과 후 학습 폐지로 학원 교습비만 더 오른 것 같다“고 푸념했다.

정부가 공교육에서 영어 억누르기 정책을 점점 더 강화하고 있다. 2014년 선행학습금지법(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 특별법)을 도입해 초등 1, 2학년 정규 교육과정에서 영어 교육을 엄격하게 금지한 데 이어 올해부터는 방과 후 영어수업까지 금지시키기로 했고, 한 발 더 나아가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방과 후 영어까지 금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 뿐 아니라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에서는 영어 영역을 절대평가로 전환했다.

공교육 내 영어 영향력을 줄여 사교육 수요도 감소시키겠다는 의지를 담은 행보인데, 이를 비웃듯 영어 사교육 시장은 되레 팽창하고 있다. 부모들은 공교육이 해결해주지 않는 영어 교육을 사교육에 맡기고 있는 것인데, 빈부 격차에 따른 영어 능력의 격차도 점점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교육당국이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하소연들이 쏟아지는 이유다.

정부 의지와 거꾸로 가는 영어 사교육

정부가 영어 공교육 축소 정책에 집착하는 건 너도나도 경쟁적으로 어린 나이에 영어 교육을 시작하고, 덩달아 사교육이 과열되는 현실을 바로잡자는 취지다. 하지만 정부가 억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사교육 시장은 팽창하고 있다. 규제의 역설이다. 통계청의 2016 사교육비 조사에 따르면 초·중·고 학생의 영어 사교육비 총액은 5조5,443억원. 여기에 유아 대상 업체까지 합하면 영어 사교육 시장은 6조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영어 유치원’으로 불리는 유아대상 영어학원은 선행학습금지법 시행해인 2014년 326곳에서 지난해 465개로 52% 늘었다. 교육부는 지난해 영어 유치원 시장 규모를 최대 2,700억원으로 추산했는데, 2016년(2,500억원 가량)보다 8%나 늘어난 수치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어린이집 원장 이모씨는 “강남권에선 유아 가운데 60% 이상이 일반 유치원 대신 영어 유치원으로 진학한다”며 “파닉스 정도는 당연히 떼고 초등학교에 가는 게 이곳의 법칙”이라고 말했다.

특히 올해 새 학기부터 초등 1, 2학년을 대상으로 한 방과후 영어 폐지가 예고되자 사교육 수요는 더 늘어나고 있다. 그나마 방과 후 수업으로 영어 학습을 시켜왔던 부모들이 일제히 사교육 시장으로 눈을 돌리고 있고, 이를 놓치지 않으려는 학원과 학습지, 화상영어 업체들이 발 빠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탓이다. 이들 학원들은 “방과후 영어 금지에 대처할 만한 교육 방식을 일찌감치 찾아야 한다” “방과후 영어보다 사실상 더 저렴한 비용으로 영어 교육이 가능하다” 등 문구로 대대적 홍보에 나서고 있다.

누구는 알파벳도 모르고, 누구는 자유롭게 영어 대화하고

정말 정규교육에 영어가 편성되는 초등 3학년까지 모든 아이들이 영어 학습을 전혀 하지 않는다면 맞는 말이지만, 사교육이 그 자리를 메우는 현실에서는 빈부에 따른 영어교육 격차만 더 벌어질 공산이 크다는 게 많은 학부모들의 주장이다. 특히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영어교육을 금지하면 사교육 업체인 ‘영어 유치원’의 인기가 더 치솟을 건 자명하다고 말한다. 4세 딸을 둔 홍영선(35)씨는 “부자들만 보낸다고 하는 영어 유치원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는다고 하니, 영어 유치원을 보내야 하는지 심각하게 고민 중“이라며 “영어 유치원에 다닌 아이는 외국인과 자유롭게 대화하는 수준인데, 일반 유치원에 다니면 알파벳조차도 모르는 상황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절실하다고 누구나 영어 유치원을 보낼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더 큰 문제다. 교육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영어유치원의 1인당 월평균 교습비 및 급식비, 차량비 등 수강료는 82만623원에 달했다. 아이가 2명이라면 영어 유치원 비용만 160만원 이상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영어 조기교육 필요성 공방도 다시 일고 있지만 근거없는 주장만 난무할 뿐 어느 쪽도 검증된 결과를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홍씨는 “남들은 다 조기교육을 하는 현실을 외면한 채 정부 얘기만 따르기는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교육부는 적용 시기를 조율 중이긴 하지만 유치원ㆍ어린이집 방과 후 영어를 금지하겠다는 방침은 확고하다는 입장이다. 선행학습 금지에 따라 초등 1, 2학년에 대해 허용하지 않는 것인데, 유치원과 어린이집에는 허용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적지 않은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교문위) 소속 의원들이 개별적으로 반대 의견을 교육부에 낸 것으로 전해져 국회를 통한 설득이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이병민 서울대 영어교육학과 교수는 “학교만 다녀도 교육에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정작 현실은 공교육만 따라갔다가는 경쟁에서 낙오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파다하다“며 “정부 정책의 방향성이 옳더라도 이상만 쫓아서는 안 되며 현실을 감안한 정책으로 다듬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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