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씨름, 발등 밟기, 동전 업다운…
생각 없이 집중하다 속마음 툭 나와
17년간 초ㆍ중ㆍ고 5000여명 상담
부모와 아이 친해져야 문제 해결
“아빠랑 얘기 좀 할까?” 잘해주고 싶어 말을 걸었던 건데, 어느새 훈계를 하고 있다. 말 없이 거실 바닥만 노려보고 있는 아이. “대답 좀 해봐, 응? 응?” 결국 치솟는 화를 참지 못하고 터뜨린다. “너 도대체 뭐가 불만이야?” 아이는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고, 곧이어 들리는 문 닫는 소리. 쿵!
북한군도 두려워한다는 중2병. 이 병을 앓고 있는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이 시기는 단지 사춘기라는 말로는 형용할 도리가 없는 지옥이다. 그 순하고 착하던 아이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억장이 무너지고, 뒷모습만 보여주는 아이에 대한 원망으로 우울증까지 온다. ‘아이의 뜻을 무조건 수용해라’ ‘그냥 놔두는 게 상책이다’ ‘시방 위험한 짐승이려니 여기고 그저 인내하라’ 등 수많은 전문가 조언이 쏟아지지만 실효를 거두지는 못한다.
중2병 아이와의 대화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건 몸이 아닌 말로 대화를 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전문가가 있다. 국내 첫 모험놀이 상담가 방승호 아현정보산업고등학교 교장이다. 모험놀이란 간단한 게임이나 놀이를 즐기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놀이 기반 상담(ABCㆍAdventure Based Counseling)이다. 모험이란 말이 들어가 생소하지만, 미국에서는 청소년 상담 프로그램으로 효과가 검증된 프로그램이다. 최근 ‘우리집 모험놀이’(이지스에듀 발행)라는 책을 펴낸 방 교장을 만나 중2병 퇴치법을 들어봤다.
● 말은 묻어두고 일단 놀이부터 시작하라
평범한 중학교 기술교사로 교직생활을 시작했던 방 교장은 17년 전 미국에 갔다 우연히 모험놀이 프로그램을 접하고 아동상담과 심리학을 공부하기 시작,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17년간 5,000여명의 초ㆍ중ㆍ고생을 상담했고, 말문을 굳게 닫은 아이들을 놀이로 무장해제시키는 ‘기적’을 체험하곤 ‘모험놀이 전도사’가 됐다. 호랑이 인형을 머리에 뒤집어 쓰고 나타나 학교 주변을 배회하는 학생들을 놀래키는 이 괴짜 교장선생님은 3집 음반까지 발표한 프로페셔널 가수이기도 하다. 대표곡은 어떤 모험놀이로도 고쳐지지 않아 그의 속을 태웠던 아이들의 흡연 문제를 노래한 ‘금연송’. 인문계 교장으로 있다가 올 초 아현정보산업고등학교로 옮겨 온 방 교장의 손에는 미용과 학생들이 실습한 빨강 매니큐어가 곱게 발라져 있었다.
“‘우리 얘기 좀 해볼까?’ 식의 접근법으로는 아이의 철벽 방어를 뚫을 수가 없습니다. 아이와 대화를 하고 싶으면 일단 불러다가 놀이부터 하세요. 모험놀이라고 해서 야외에 나가서 하는 거창한 놀이가 아니에요. 집안에서 몇 분만 투자하면 되는 간단한 놀이들이지만, 아무런 생각 없이 활동에 몰입하다 보면 아이에 대한 이런저런 판단이 사라지고 아이와의 놀이 자체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아이의 속마음이 툭 튀어나오고, 대화는 바로 이때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방 교장이 개발한 모험놀이는 3,000여개에 달하지만, 그는 집에서 부모들이 쉽게 적용해볼 수 있는 간단한 놀이로 5가지를 추천한다. 팔씨름, 발등 밟기, 동전 업다운, 차이점ㆍ공통점 찾기로 이어지는 기본과정 패키지 4개와 심화과정이라 할 만한 함께 일어서기로 구성된다. ‘애걔! 그깟 놀이로?’ 싶지만, 효과는 아주 좋다. 손을 마주잡고 상대방의 발등을 먼저 밟는 사람이 이기는 발등 밟기는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유지하며 서로 힘을 겨루다 보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면서 절로 피식 웃음이 터져나온다. 말은 일절 필요 없다. 아이가 웃는다고 괜히 사심이 드러나는 상담용 질문을 꺼냈다가는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지는 아이의 차가운 얼굴과 대면하게 될 수 있다. 말은 참고 놀이에만 집중하다 보면 웃음을 참으려 아이의 얼굴이 붉어지는 순간이 오는데, 꼭 신음하는 것 같은 얼굴이다. 그때가 아이의 아팠던 고름이 짜져 나오는 순간이다.
동전 업다운은 아이의 눈을 감게 한 후 테이블 위에 양 손바닥을 펼치고 한 쪽 손바닥 밑에 동전을 감춘다. 눈을 뜬 아이가 동전을 찾으려고 할 때 필사의 힘으로 손바닥이 테이블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포인트. 아이는 부모의 손바닥을 뒤집으려고 젖 먹던 힘까지 다 쓰고, 역시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웃음이 터진다.
여기까지 자연스럽게 진행됐다면 다음은 차분히 앉아 서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종이에 적어 발표하는 차이점ㆍ공통점 찾기를 한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대화의 물꼬가 트인다. 몸놀이가 조금 부족했다고 판단되면, 심화과정에 해당하는 함께 일어서기를 추가한다. 가족들이 서로 손을 잡고 앉아 무릎을 세워 발을 붙인 다음 동시에 일어서는 이 놀이는 서로간에 힘 조절이 어려워 처음 몇 번은 실패하게 되는데, 이게 이 활동을 흥미롭게 진행할 수 있는 중요한 성공포인트다. 마침내 일어서기에 성공했을 때 성취감과 연대감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아이의 모든 문제는 부모와의 관계가 좋아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아이가 친해야 해요. 말로 친하게 잘 지내자고 해봐야 되겠습니까? 일주일에 단 몇 번만이라도 이 간단한 놀이들을 해보세요. 저절로 서로간의 속마음을 얘기하게 될 겁니다. 놀이를 통해 아이가 비밀을 아프지 않게 털어놓을 수 있게 되는 거죠.”
● 놀이로 마음을 열면 아이의 상처가 보인다
한바탕 웃고 놀며 자연스럽게 대화무드가 형성됐다면, 이제부터는 아이의 상처를 찾는 작업을 조심스럽게 수행해야 한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이렇게 잘 키웠는데 무슨 상처가 있을까’ 생각하지만, 아이들의 모든 문제행동 뒤에는 상처가 숨어있다.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는 부잣집 모범생이라도 마찬가지다. 아이의 불안과 공포, 걱정, 슬픔, 배신감 등 정서를 세심하게 살피는 게 중요하다.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왕따와 학교폭력.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다는 인류 보편적인 바람도 이 의혹 앞에서는 쓸데없는 사치가 된다. 특히 여자아이들의 교묘하고 지능적인 따돌림은 아이에게 치명적인 내상을 입힌다. “피해를 입은 아이에게는 자존감 회복을 도와줄 수 있는 안정된 친구를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합니다. 더 이상은 해로운 친구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부모가 적극 도와야 해요. 아이들은 단 한 명이라도 진짜 친구가 있으면 망가지지 않습니다. 단 한 명의 부모, 단 한 명의 멘토만 있어도 무너지지 않죠. 놀이를 통해 음습하게 숨겨져 있던 비밀과 상처를 드러내 햇빛을 보게 하는 것, 그게 가장 빠른 치유예요. 답답한 자기감정을 표출하지 못하면 훗날 인지가 왜곡될 수 있습니다.”
학교폭력은 절대 가정에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방 교장의 지론이다. 학교와 함께 풀어야 할 문제다. 방 교장은 경찰의 힘을 얻을 것을 적극 추천한다. 학교에 경찰을 부르는 것은 막가파 부모나 할 짓 같지만, 몇 년 전부터 각 학교마다 담당경찰관이 배정돼 있고, 이들의 전문성도 점점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양측 부모 간의 감정대립으로 치닫기 쉬운 학교폭력 문제는 경찰이 중립적으로 균형을 잡아줄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피해자에게는 보호받고 있다는 안정감을, 가해자에게는 더 이상 장난으로 치부될 수 없는 범죄임을 일깨워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 게임중독에 잠만 자는 우리 아이 어떻게…
“아이들은 단지 게임이 너무 재미있고 좋아서 중독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앞에 놓인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작동하는 회피기제죠. 잠만 자는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문계 고교에서 한 반에 ‘인 서울 대학’ 입학이 가능한 학생은 1, 2명이에요. 내용은 어렵고, 아예 포기를 하는 거죠. 교실들 돌아다니다 보면 70% 이상이 다 자요. ‘어우, 새끼들. 다 자네’ 분통이 일지만, 걔들 속은 더 답답합니다.”
방 교장은 부모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아이들의 꿈을 찾아주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공부 하나만이 갈 길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버리고, 아이의 적성과 재능을 찾는 데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것. “아이에게 ‘네가 무엇을 하든 무조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넌 뭘 하고 싶니?’ 물어보세요. 그리고 그 꿈을 지지해주세요.”
아이가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 하면 물론 난감해진다. 이럴 때는 일단 독서로 간접적 자기 표현에 익숙해지게 하는 동시에 부침이 심한 연예인의 삶과 생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연예인이 있는 친인척이나 지인들의 도움을 받는 게 효과적이다. 계획을 세분화해서 꿈을 이루기 위해 6개월 후 무엇을 할지, 그걸 위해 오늘은 뭘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천하는 훈련을 하게 하면 좋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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