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낙후된 창업육성 시스템
사전 규제로 창업자 상상력 제한
사업 시작전 허용 여부 파악에 진땀
미국은 도전 자유로운 '방목형 규제'
정부나 업계에서 초기 창업기업(스타트업) 육성을 위한 각종 정책과 시도를 하고 있지만 기대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 성공 사례를 꼽는다면 쿠팡으로 대표되는 소셜커머스분야, 선데이토즈와 데브시스터즈가 떠오른 모바일게임 분야 정도다.
특히 일부 분야는 스타트업 불모지다. 전세계적으로 수천 개 스타트업이 쏟아진 핀테크 분야에서도 국내는 지난해까지 스타트업이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스마트폰으로 택시를 호출하거나 직접 택시영업을 하는 미국 우버나 중국 디디타처 같은 서비스들이 뜨고 있는데 국내는 최근 카카오택시가 나오기 전까지 유사 서비스가 거의 없었다.
하드웨어 분야도 마찬가지다. 중국 DJI가 대중이 즐길 수 있는 드론으로 세계를 석권하는 동안 국내에서는 드론파이터 외에 변변한 드론기업을 찾아보기 힘들다.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샤오미, 원플러스 등 새로운 중국 스타트업들이 돌풍을 일으키는 동안 국내에서는 새로운 기업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팬택은 쓰러지고 LG전자의 스마트폰 사업은 더욱 어려워 졌다.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에는 명백한 정책의 차이가 있다.
● 루프페이와 렌딩클럽을 낳은 미국의 네거티브형 규제정책
미국 도로는 아무 교차로나 유턴을 할 수 있다. 유턴을 할 수 없는 곳만 금지표시를 해놓았다. 산업 규제도 비슷하다. 금지 사항(네거티브ㆍNegative)만 표시하고 나머지는 모두 자유롭게 해도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규제를 신경쓰지 않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기업이 많이 나온다.
대표적 경우가 국내에서는 신용카드사들의 반발로 출현하기 힘든 핀테크 기업 루프페이다. 신용카드를 복제해서 스마트폰에 집어넣는 기술을 개발한 이 업체는 최근 삼성전자에 팔리며 화제가 됐다. 약 2,500억원에 매각된 이 업체의 윌 그레일린 최고경영자(CEO)를 만났다. 그에게 기존 신용카드사들의 허락을 받고 개발한 기술인 지 물었다. 그는 “그런 규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해도 된다”며 “허락받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국내의 경우 신용카드 정보를 신용카드사 동의없이 무단으로 서버에 저장하는 것부터 위법일 가능성이 있다. 삼성전자는 루프페이 기술을 이용한 삼성페이를 개발해 20일부터 국내서비스를 시작했고 28일 미국에서도 선보였다.
규제를 신경쓰지 않고 시작한 스타트업도 덩치가 커지면 규제 당국이 소비자보호를 위해 나선다. 개인간 투자와 대출을 연결해주는 렌딩클럽이 여기 해당한다. 창업 후 규제에 상관없이 사업 규모를 키우다가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로부터 영업정지를 당했다. 하지만 6개월뒤 규제기관과 합의 후 개인대개인(P2P) 대출시장을 크게 키웠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벤처투자기업 트랜스링크캐피탈의 음재훈대표는 “미국의 규제시스템은 커다란 목장에 양떼를 풀어놓고 울타리를 쳐놓는 방목형”이라며 “울타리 안에만 있는 한 마음대로 해볼 수 있어 혁신이 많이 나올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허용(포지티브ㆍPositive)하는 것만 할 수 있다. 국내 도로는 유턴 허용 지역이 따로 있다. 규제시스템도 마찬가지다. 그렇다 보니 국내 스타트업은 사업 시작 전에 허용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법령을 세심하게 봐야 한다. 미국처럼 사후 규제가 아닌 사전 규제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국내 스타트업 창업자들은 필요이상으로 법률지식에 해박한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진다. 제품 개발보다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이나 전자금융거래법 몇조 몇항을 외우고 있다. 이런 도를 넘는 규제는 창업자들의 상상력을 제한한다.
데이터 이용 방법도 차이 난다. 미국은 공공데이터를 되도록 많이 공개한다. 법원 판례정보, 부동산거래정보 등 수많은 공공데이터가 공개돼 있고 이를 가공해서 판매하는 데이터업체들이 많다. 그래서 공공 데이터를 모아서 분석해 자동 투자를 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거나 개인 및 기업의 공개데이터로 신용분석을 해주는 핀테크기업들이 등장했다. 빅데이터 산업도 이런 기반 위에서 성장한다.
하지만 한국은 다르다. 공공기관 및 사기업도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고 공개한 경우 각종보안규정과 개인정보보호법에 묶여 가공하기 어렵다. 공공 데이터를 이용한 스타트업이 나오기 힘든 구조다.
● 휴렛패커드의 워크데이와 힐러리 클린턴의 이메일 3만통의 교훈
여기에 서로 다른 기업 문화도 스타트업의 성패에 영향을 미친다. 미국기업들은 잘 할 수 있는 핵심 분야에만 집중한다. 나머지는 주저 없이 외부기업의 제품과 서비스를 사서 쓴다. 그래야 외부 소프트웨어 회사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휴렛패커드는 사내 인사관리를 워크데이가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구입해 한다.
국내 대기업들은 정보기술(IT) 계열사를 시켜서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직접 개발하거나 하청을 준다. 당연히 역량있는 독립 소프트웨어회사들이 클 수 있는 자리가 없다. 삼성전자도 올해부터 마이크로소프트(MS)의 오피스제품을 쓰지만 지난해까지 자체 개발한 문서작성용 소프트웨어 ‘훈민정음’으로 내부 문서를 만들었다. 이 같은 문화는 전체적인 산업 경쟁력의 저하를 불러온다.
국내 기업의 최고 경영진들은 미국 기업보다 혁신을 받아들이는데 둔감하다. 미국 민주당의 유력대선후보 힐러리 클린턴은 요즘 이메일 때문에 궁지에 몰렸다. 국무장관시절 사설 이메일 서버를 써서 주고 받은 이메일이 문제가 된 것이다. FBI에서 힐러리가 사설이메일서버를 통해 국가기밀이 담긴 이메일을 주고 받은 일이 있는지 조사 중인데, 이메일 갯수가 3만여통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미국 장관들이 업무에 얼마나 이메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지를 보여 준다.
젭 부시 등 공화당 대선후보들은 우버를 옹호하며 유세 중에 우버 차량을 불러서 이용하한다. 이처럼 미국의 교수, 기업인, 관료 등 지식인들을 만나보면 능수능란하게 트위터, 블로그 등 소셜미디어나 우버 등 새로운 혁신서비스를 일상생활에서 적극 활용한다.
국내는 아쉽게도 이런 모습을 흔히 찾아보기 힘들다. 금태섭 변호사의 신간 '이기는 야당을 갖고 싶다’에 이메일을 사용하지 않는 최시중 초대 방송통신위원장 이야기가 나온다. 국가 IT정책을 총괄하는 수장이 이메일도 쓸 줄 모른다는 것이다. 얼마 전 장관 등 정부 고위직 역임자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면서 인터넷쇼핑이나 인터넷뱅킹을 직접 하는 지 물어봤다. 경험자는 20여명 가운데 단 2명 뿐이었다.
그만큼 혁신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미국보다 우리가 훨씬 보수적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정책이나 기업의 의사결정권자들이 혁신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늦다면 당연히 혁신기업에 대한 우호적인 정책과 투자, 인수합병 등이 진행되기 힘들다.
국내에서 다양한 분야에 걸쳐 혁신적인 스타트업들이 지금보다 많이 등장하려면 위에 열거한 규제시스템이 포지티브에서 네거티브 형으로 전환해야 하고 정부나 기업의 문화도 혁신을 적극 수용할 수 있도록 개방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대통령과 장관들부터 먼저 나서서 혁신 스타트업의 제품과 서비스를 쓰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국내에서 진정한 창조경제가 제대로 꽃을 피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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