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촌역으로 착각해 서빙고역 내려
평소대로 환승하려다 추락
시민이 발견해서야 겨우 대피
“스크린도어 없으면 밧줄이라도…”
“갑자기 뚝 떨어졌어요. 손으로 더듬더듬 해봐도 눈이 보이지 않으니 어딘지 알 수 없었어요. 웬 ‘자갈밭’ 같은 곳이긴 했는데.”
1급 시각장애인 왕모(71)씨는 지난달 21일 기억을 떠올릴 때면 식은땀에 몸서리부터 친다. 경의중앙선 서빙고역 선로에 떨어졌던 그날 11분 정도 시간 동안, 생사의 갈림길에 버려진 채 홀로 느껴야 했던 공포 탓이다.
사고는 낮 12시쯤 발생했다. 당시 사고를 그는 “너무도 황당했다”고 기억했다. 본래 ‘이촌역’에 내려야 했지만 역을 착각해 전 역인 서빙고역에 내린 게 불행의 시작이었다. 눈만 보였다면 착각할 이유가 없지만, 그의 시야는 어둠뿐이었다. 안내방송을 잘못 들었나 싶지만, 확인할 수가 없다.
이촌역이라 여긴 왕씨는 평소처럼 ‘갈아타는 곳’으로 움직였다. 보통 시각장애인은 자주 다니던 길마다 목적지로 갈 수 있는 이정표를 정해 놓기 마련인데, 그들은 이를 ‘랜드마크(landmark)’라고 부른다. 왕씨가 정한 이촌역 랜드마크는 지하철 ‘6-4’ 칸에서 내려 여덟 걸음 직진하면 나오는 ‘벽’. 다른 역인 서빙고역에 그 랜드마크가 있을 리 만무했다. 서빙고역에서 그때 그를 맞이한 건 벽이 아니라 한 걸음 더 걸으면 선로로 추락할 승강장 끝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의 추락을 막아 줄 스크린도어도 없었다. 승객이 타고 내리는 경의중앙선 쪽 승강장에는 스크린도어가 있지만 왕씨가 향한 곳은 하필 맞은편 화물 철로 쪽이었다. 왕씨 같은 시각장애인이 속수무책 철로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구조다. “떨어진 뒤에 상체가 너무 아파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철로인 거 같은데, 어떤 열차가 언제 올지 모를 일이고, 어떻게 피해야 하나 너무 무서웠어요.”
할 수 있는 일은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몸이 너무 아파 소리를 지르기도, 도움을 요청하기도 어려웠다. 불행히도 그 시간, 역에는 다른 열차 이용객이 없었다. 역무원들도 사고를 알지 못했다. 왕씨가 열차 선로로 떨어지는 장면이 폐쇄회로(CC)TV에 고스란히 찍혔지만 모두 다른 업무에 바빠 CCTV 화면을 보지 못했다.
그렇게 11분이 지났다. 선로에 떨어진 게 12시5분인데 16분쯤이 돼서야 승강장으로 들어온 시민이 왕씨를 발견해 대피시킬 수 있었다. 다시 14분이 흐른 30분, 그가 쓰러져 있던 선로로 ITX청춘열차가 용산역을 향해 빠르게 지나갔다. 늦게 발견됐다면 갈비뼈 6군데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전문가들은 “왕씨 같은 시각장애인 철로 추락 사고는 비일비재하다”고 꼬집었다. 왕씨만 해도 벌써 3번째 경험이라고 했다. 홍서준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연구원은 “시각장애인의 추락 사고를 막기 위해서는 모든 승강장에 스크린도어를 설치하는 게 최선”이라며 “그게 어렵다면 추락방지 울타리 사이에 ‘밧줄’이나 ‘쇠사슬’ 정도만 걸어놔도 추락 예방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무 기자 allclea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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