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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내가 만난 예술노동자들

입력
2016.05.20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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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5월 초였다. 대하소설 ‘아리랑’ 탈고를 앞두고 있던 소설가 조정래 선생을 인터뷰했다. 20년도 더 지난 일을 생생히 기억하는 건 그 날 받은 모종의 강렬한 인상 때문이다.

그 며칠 사이 나는 작가 인터뷰를 위해 ‘태백산맥’ 10권을 다시 읽고 전 12권으로 완간될 ‘아리랑’을 9권까지 독파하느라 몸살에 걸린 상태였다. 줄줄 흐르는 콧물을 닦아대며 집필실로 갔다. 집 뒤 야산에 핀 아카시아 꽃향기와 녹음을 배경으로 흰옷을 입은 그의 모습이 낯설게 들어왔다. 한눈에도 피로해 보였다.

1983년 ‘태백산맥’이 문예지에 연재될 때부터 찾아 읽었으니 나는 작가에 대해 궁금한 게 많은 독자였다. 콧물 닦은 휴지가 수북이 쌓여갈 때까지 인터뷰가 계속됐지만 그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다만 이야기 중에 왼손으로 오른 손가락을 꾹꾹 누르다가 오른팔로 왼팔을 비틀 듯 주무르고, 비슷한 동작을 반복하는 게 눈에 걸렸다. 본인도 모르게 습관으로 굳어진 듯했다.

인터뷰 말미에야 이유를 알았다. 매일 책상에 앉아 원고를 쓰다 보니 벌써 여러 해째 작가는 팔과 손가락의 마비증상을 겪고 있었다. 혈류활동이 원활하지 않아 몸속 피가 죄다 밖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고통에 시달린다는 사실도 털어놓았다. 정작 놀라웠던 건 이 상황을 대하는 그의 태도였다. “노동치고 이만큼의 고통이 따르지 않는 일이 어디 있을까요?” 그는 웃으며 반문했다. 게다가 자기 일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명예까지 따르니 감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몸이 아파서 정 힘들 때는 지금 내 소설 공간의 주인공들을 생각해요. 식민지 시대에 억울하게 죽은 우리 민족의 수가 400만 명입니다. 그런데 내가 이 작품 12권을 마친다 해도 400만 자가 채 되지 않아요. 내 손으로 쓰는 한 글자 한 글자가 그들의 넋을 담아낸다고 생각하면 이깟 고통쯤 참을 만해요.”

그 일 이후 예술가를 보는 내 관점은 막연한 선망에서 실체를 지닌 존중으로 선회한 것 같다. 시각이 바뀐 까닭이리라. 다른 작가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정래 선생을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 때 이른 유명세로 동세대인의 부러움과 질시를 받던 작가와 일하게 됐다. 밖에서 볼 때 화려하던 그의 삶은 현실에 없었다. 당시 내 눈에 그는 꼭 죽을 날을 받아놓은 사람처럼 작품에 임했다. 몸이 버텨내지 못해 양쪽 귀에서 진물이 흐르고 발바닥이 갈라져도 멈추지 않았다. 모니터 앞에 앉아 쓰고 검토하고 고치고, 그러는 틈틈이 자료 수집하고 공부하고 또 썼다. 애처로웠다. 몸이 따라주지 않는 현실을 에둘러 경고하는 내게 그는 높이 18m 비계에 누워 시스티나 성당 대형 천장화를 완성해낸 미켈란젤로를 이야기했다. 조수를 여럿 두고 협업에 가깝게 작업한 라파엘로와 달리 거의 모든 공정을 직접 감당하느라 나중에는 고개가 앞으로 숙어지지 않는 후유증에다 시력 저하, 욕창까지 앓아야 했던 미켈란젤로 말이다. 결국 창작활동이란, 10%의 창조성과 90%의 진저리나는 노동으로 귀결되는 것 아니냐며 그는 해맑게 웃었다.

그의 말마따나 내가 만난 화가와 음악가와 문인들은 비슷한 증상을 직업병으로 달고 살았다. 양상은 해외라고 다르지 않다. 그래서 독일의 한 작가는 이를 두고 ‘예술가에게 부여되는 가중처벌’이라 표현했다.

며칠 전 그림 대작 논란에 휘말린 유명인이 ‘관행’이라는 말로 해명하자 당장 대중이 불뚝 성을 냈다. 주문자상표부착방식(OEM) 공산품과 예술품이 뭐가 다르냐는 비아냥부터 ‘어차피 예술 하는 놈들 다 사기꾼’이라는 욕설이 무차별로 쏟아졌다. 수많은 예술노동자가 한순간 덜떨어진 협잡꾼으로 몰려버렸다. 스캔들의 주인공은 불쾌해할 그림 구매자에게 환불하겠다고 했지만, 다른 작가들이 받았을 모욕감과 상처, 그들에게 덧씌워진 오해의 그물은 어쩔 것인가. 나는 그게 불쾌하고 마음 아프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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