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성남시장이 최근 “머리를 쓰나 손을 쓰나 발을 쓰나 모두 귀한 노동”이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달콤하고도 씁쓸한 말이다. 그 말이 (관념상의) 진실일지언정, (현실에서) 사실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일 테다. 급식조리원이 기자를 하기 어렵듯, 나도 급식조리원을 못할 것 같은데 어쩌다 이 차이는 적성이 아니고 우열이 됐을까. 구의역 김군이 사망했을 때, 김군의 월급(144만원)과 해당 업체의 서울메트로 출신 낙하산들의 월급(422만원)을 비교해본 사람은 느꼈을 것이다. 노동가치에 대한 인지부조화와 울분, 무력감 같은 것을.
한국은 노동가치를 진지하게 토론해 본 적이 없는 사회다. 그러니 “조리사라는 게 별게 아니다. 옛날 같으면 그냥 조금만 교육시켜서 시키면 되는 거다. 밥하는 아줌마가 왜 정규직화가 돼야 하는 거냐”(이언주 국민의당 원내수석부대표)는 말을 쏟고, ‘한국은 식당 웨이터 월급이 의사의 19% 불과…독일은 32% 수준’이라는 기사에는 “학교 다닐 때 놀러만 다닌 웨이터가 의사의 19%라도 노력을 했느냐”는 댓글이 달린다.
나는 학교 청소노동자가 기자인 나보다 월급을 적게 받는 것이 당연시 되는 것에 의문을 품은 적이 있고, 아직 100%의 답을 찾지 못했다. 가장 근접한 답은 자본주의에서 노동도 수요ㆍ공급 법칙을 따르고, 아무나 할 수 없는 희소성 있는 노동일수록 더 대우받는다는 원리일 것이다. 아무나 할 수 없는 노동, 교육 받은 똑똑한 사람들, 시험을 통과한 그룹의 사람들에게만 허용되는 노동. 아마 ‘고귀한’ 변호사 출신인 이언주 의원은 이 점 때문에 자신과 ‘급식조리사’를 분리한 것 같다.
그러나 이 의원은 간과한 것이 있다. 전문직들은 상당부분 시장법칙을 거스르는 ‘인원 통제’로 높은 대우가 유지된다는 점. 왜 식당들은 무한경쟁 속에서 적자생존 해야 하는데, 변호사나 의사와 같은 전문직들은 배출 인원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보호 받는가? 전문직은 일정 수준의 능력을 검증 받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이들의 자격기준이 대부분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의대 정원제한, 변호사시험 합격자수 제한 등) 방식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인원 증가를 극구 반대하는 해당직종 이익단체의 힘과 이들이 가진 권력이 작용했으리라. 결국 ‘아무나 할 수 없는 노동’이란 시장의 법칙이 아닌 독과점을 유지하는 체계, 권력의 뒷받침으로 탄생한 측면도 크다. 오바마 정권 시절의 백악관이 인공지능 관련 일자리정책으로 ‘총고용을 줄이는 역할을 하는 직업 면허 제도 축소 필요’를 꼽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경쟁지상주의를 너무 오래 겪은 나머지 노동가치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병을 앓고 있다. 경쟁지상주의 이념이 유지되려면 승자에게 혜택이 몰려야 하고, 사회 구성원들이 비판 없이 받아들이고 체득해야 한다. 이 때문에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문제를 두고 “정규직이 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비정규직으로 들어와서 날로 먹으려 하느냐”는 반응이 나온다. 특정 직업을 얻기 위한 경쟁(시험도 시험이지만 돈도 많이 든다)이 힘들어, 그 과정을 그 직업의 노동가치로 착각하는 경우를 숱하게 본다. ‘나는 노력해서 얻었다’는 인식. 이런 인식이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사회는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에게 위험한 일, 힘든 일, 고용불안, 낮은 월급이라는 4종 세트를 몰아줬다. ‘불행의 몰빵’ 이다.
독일 TV에서는 ‘테니스 선수의 연봉은 얼마가 적당한가’식의 토론을 한다고 들었다. 어느 사회도 순수한 노동가치를 도출하기는 어렵지만, 노력하는 것이다. 제1원칙은 그 직업을 갖기 위해 어떤 경쟁을 뚫었는지가 현재 얼마나 힘든 일을 하고 있느냐 하는 노동의 본질을 잠식해서는 안 된다는 점 아닐까. 물론 능력이나 업무량에 따른 차별은 있을 수밖에 없고, 없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에 앞서 동일노동의 기준, 이질노동간의 적절한 대우 차이를 도출하려는 노력과 체계, 그리고 편견 없이 노동가치의 본질을 보려는 자세가 전제돼야, 공정한 지지대 위에서 능력 사회도 세워질 것이다.
이진희 정책사회부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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