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박대통령 탄핵안 가결
권한 정지된 朴 "송구스럽다"
황교안 총리, 권한대행 체제로
헌법재판소 첫 재판관 회의
2016년 12월 9일 대한민국은 비극의 역사와 민주주의 진보의 역사를 동시에 썼다. 비선실세에 권력을 내어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 이날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가결한 것은 헌정사에 없어도 좋을 오점이다. 그러나 대통령에 위임한 권력을 거둬들이기 시작함으로써, 권력의 진짜 주인인 시민들은 정당한 권한을 행사했다. 보다 근본적 가치인 민주주의를 복구하겠다는 열망 앞에 이념과 세대는 중요치 않았다. ‘주권자’라는 이름 아래 시민들은 결속했다. 나태하던 대의 정치는 놀라고 긴장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가장 뜨거웠던 광장 민주주의는 탄핵절차를 현실화한 데 이어 한국 정치의 쇄신을 이끌 전망이다.
조대엽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탄핵 정국에서 보여준 시민의 힘은 정체돼 있던 대의민주주의 질서를 새로운 형태로 진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민주주의 제도를 앞서 도입한 선진국들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세계사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비선실세 최순실(60ㆍ구속기소)씨가 대통령 연설문 수정 등 국정을 농단한 사실이 드러나고, 박근혜 대통령이 이를 인정한 10월 25일만 해도 대통령 탄핵이 현실이 될 것을 예상한 이들은 적었다. 지난달 20일 최씨 등의 공소장을 통해 박 대통령의 혐의가 드러나면서 정치권이 탄핵 논의를 시작했지만 야권은 이견을 보이고 비박계는 오락가락했다. 정치권을 몰아세운 것은 10월 29일 2만명에서 지난달 12일 100만명, 이달 3일 232만명으로 거침없이 불어난 촛불 민심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최대 규모로 기록된 촛불집회는 그 내용면에서도 역사적이다. 조직적으로 동원되지 않은 자발적 시민만으로도 광화문광장은 넘쳐났다. 헬조선과 흙수저 등으로 상징되는 고단한 현실을 외면한 채 각종 특혜를 누리고 편법을 저지른 비선실세와 이를 묵인한 대통령을 향한 분노가 이념과 세대를 가리지 않고 주권자로서의 자각을 일깨운 것이다. 이정희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6월 항쟁이 권위적 억압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이었다면 이번 탄핵 정국은 실질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즉 민주주의가 심화 발전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불거진 시민운동으로 봐야 한다”고 규정했다.
시민들은 광장에서 자유롭게 발언하고 평화롭게 노래하면서 농락당한 민주주의를 회복시켰다. 질서 유지는 경이로웠다. 대규모 인원이 모인 6차례 촛불집회에서는 단 한 차례의 불상사도 발생하지 않았다. 법원이 청와대 100m 앞까지 집회를 허용하며 집회금지의 성역을 없앤 것도 성숙한 시민의식의 산물이라는 평가다. 조 교수는 “촛불집회의 진행과 참여 방식을 보면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을 정도로 민주적이었다”며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한 진보를 이뤄낸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인들을 직접 압박하는, 적극적인 정치 참여도 이뤄졌다. 탄핵 투표 전까지 전국 새누리당 의원 지역구 사무실 앞에서 1인 시위가 열렸고, 탄핵을 앞둔 8, 9일에는 국회 앞에서 시국대토론회가 열렸다. 지난달 30일 밤 휴대폰 번호가 공개된 의원들에게 전화와 문자를 보냈다. 촛불민심을 대변할 온라인시민의회 대표단을 꾸리자는 움직임까지 발전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과거처럼 사람들을 모으는 역할에 한정되지 않고, 의견을 공유하고 수렴하는 공론장으로서 진일보했다는 분석이다.
탄핵 정국의 고비를 넘어선 시민의 힘은 이제 그 이상을 바라보고 있다.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시민들의 요구는 박근혜 퇴진에 있기 때문에 공을 넘겨 받은 헌법재판소에 대한 압력에도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87년 체제가 정착한 뒤 구태만 반복하는 정치권에 대한 혐오로 정치 참여율이 낮아지면서 대의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우려가 지속적으로 제기됐지만, 이번에 시민들 스스로 위기를 극복했다는 자신감이 적극적인 참여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내영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시민들이 광장에서 보여 준 분노 그리고 탄핵 가결까지 시켰다는 자신감이 다른 타깃으로 옮겨가면 정치판을 근본적으로 바꿀 시민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시민들에게 대통령을 포함한 어떤 정치인에 대해서도 위임한 권력을 마음대로 전횡하게끔 놔두지 않겠다는 인식의 고양이 생겼다는 점에서 이번 탄핵정국은 한국정치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날 오후 3시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박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은 예상보다 높은 78%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됐다. 재적의원 300명 중 299명이 참여한 가운데 찬성 234표로 가결됐다. 반대와 기권은 각각 56표와 2표였고, 무효도 7표나 됐다. 야권과 무소속 의원 172명이 전원 찬성표를 던졌다고 가정하면, 새누리당에서 절반 가량인 62명이 탄핵에 동의한 것이다. 본보가 7, 8일 새누리당 의원 전원을 상대로 실시한 전수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하면 비박계와 중립성향 의원 54명이 모두 찬성 표결했고, 친박계에서도 8명 이상이 이탈한 것으로 분석된다. 유일하게 표결에 참석하지 않은 것은 친박 실세이자 핵심인 최경환 의원이다.
오후 7시3분 국회의 탄핵의결서 등본이 국회 의사국을 통해 박 대통령에게 전달되는 순간 박 대통령의 권한은 정지됐다. 박 대통령은 앞서 국회의 탄핵안 가결 소식을 듣고 국무위원 간담회를 소집해 “저의 부덕과 불찰로 이렇게 큰 국가적 혼란을 겪게 돼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송구스럽다는 말씀을 드린다”며 “앞으로 헌법과 법률이 정한 절차에 따라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과 특검의 수사에 차분하고 담담한 마음 가짐으로 대응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헌법재판소는 전자배당을 통해 강일원 재판관을 주심으로 정하고, 이날 바로 첫 재판관 회의를 열었다. 헌재 관계자는 “대통령에게 답변서를 16일까지 제출하도록 요청했다”고 밝혔다. 헌재는 대통령의 답변서를 받는 대로 재판관 9명 전원이 참석하는 평의(評議)를 열고 변론기일과 대통령 소환 여부, 소환일정 등을 정할 계획이다. 재판관 9명 중 6명 이상이 찬성하면 대통령 파면이 결정된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 국정 수행을 시작했다. 황 총리는 탄핵안 가결 직후 국방ㆍ외교ㆍ행정자치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군경 경계태세 강화 등을 지시했다. 또 오후 7시 정부서울청사에서 긴급 국무회의를 연 뒤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안보에 한치의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경계태세를 강화하고 치안에도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김성환 기자 bluebird@hankookilbo.com
박진만 기자 bpbd@hankookilbo.com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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