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서 발견과 발명은 구분된다. 발견이 낯익은 대상에서 낯선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라면, 발명은 대상과 무관하게 낯선 의미를 빚어내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발견은 소통 가능성(서정시), 발명은 소통 불가능성(비서정시)과 직결되고, 다시 발견은 언어의 투명성(우리), 발명은 언어의 불투명성(나)과 연관된다. 우리 현대시는 발견과 발명 사이에 서식한다.
최종적으로 두 편을 놓고 논의가 이어졌다. 발견인가, 발명인가. 한 작품은 습작기가 단단해 보였다. 방(가족)을 중심으로 대상을 장악하고 그것을 질서화하는 능력에 신뢰가 갔다. 동봉한 응모작 수준도 일정한 편이었다. 반면, 다른 한 작품은 앞의 작품과 대척점에 자리했다. 재난 상황이라는 대상을 넘어 낯선 이미지를 통해 이질적 세계를 구축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전자는 발견의 시, 후자는 발명의 시에 가까웠다.
발견의 시가 윤종욱씨의 ‘방의 전개’였고, 발명의 시가 김복희씨의 ‘백지의 척후병’이었다. 윤종욱씨의 경우 ‘방의 발단’이나 ‘숲’도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었고, 김희씨의 ‘토마토라 한다’도 인상적이었다. 윤씨는 안정감이 돋보였고, 김씨는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커 보였다. 심사위원들은 고심 끝에 두 신인을 동시에 문단에 내보내기로 했다. 서로 다른 개성이 발명을 아우르는 발견, 발견을 아우르는 발명의 길을 열어나가면서 우리 시의 풍요로움에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시인으로서 탄생 장소와 시간이 같은 두 신인에게 두 배의 축하를 보낸다.
최종심에 오른 나머지 두 편의 시도 오래 기억될 것이다. 김유씨의 ‘성찬의 시간’이 갖고 있는 미덕은 가독성이었다. 일상적 언어를 능란하게 직조하는 능력이 깊이의 시학과 결합한다면 보다 성숙한 차원으로 올라설 것이다. 고동식씨의 ‘금단’은 진술(아포리즘)이 묘사를 압도하는 대목이 못내 아쉬웠다. 진술과 묘사 사이의 균형을 찾아낸다면 조만간 우리 시의 전면에 나타날 것으로 믿는다. 분발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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