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가수 유희열이 한마디 던진다. “저 서울대 나왔어요.” 그러자 같은 서울대 출신 선배인 작가 유시민이 그를 돕겠다며 나선다. “희열씨는 음악 공부 하느라…”
‘인문학 예능’이라고 떠들썩하게 언론에 소개된 나영석 PD의 새 예능 프로그램 ‘알쓸신잡’은 ‘술상 수다’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의 준말이라는 ‘알쓸신잡’은 유희열과 유시민,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소설가 김영하, 카이스트 교수 정재승 등 5명이 잡학다식 수다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이다. 나 PD에 대한 기대가 높았던 걸까. 지난 2일 첫 방송 시청률은 무려 5%를 넘기며 시청자들의 눈도장을 받았다.
그러나 남자와 여행, 술은 그렇게 신선한 소재는 아니다. 나 PD는 ‘삼시세끼’ ‘꽃보다 할배’ ‘윤식당’으로 자신의 장기를 살린 ‘여행과 먹방의 혼합’을 선보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음주를 첨가해 ‘술방’으로까지 확대한 게 이번 프로그램이다. 성인용 방송처럼 보이지만 ‘알쓸신잡’은 ‘삼시세끼’나 ‘윤식당’처럼 15세 관람가다. 안타깝게도 음주가 흡연과 마찬가지 수위의 징계(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받는다는 것을 간과한 방송사와 제작진의 무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tvN ‘인생술집’ 시즌1도 과도한 음주 장면으로 인해 19세 이상 시청자로 연령을 올린 바 있다.
그럼에도 이들 5명은 버젓이 술병이 굴러다니는, 이름도 왜색적인 경남 통영의 ‘다찌집’(화면 왼쪽 상단에 자막으로 넣음)에서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이야기했다. 그저 웃으며 넘기기엔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하다.
과학용어를 몰라 당황한 유희열의 학력 발언도 어쩌면 술 기운이 부른 실언일 수 있다. 하지만 ‘대중음악계의 지성’으로 불리며 교양 프로그램 진행 등 온갖 혜택을 누려온 그에게서 대놓고 “서울대 출신”이란 말을 들으니 당황스러운 건 시청자다. 무언가에 속은 기분까지 들었다. 제작진은 이 장면을 걷어냈어야 했다. 굳이 그의 말을 자막으로 넣어 부각할 필요가 없었다. 술에 취하면 어느 정도 용인되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잣대, 남자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꼰대 근성이 투영된 결과가 아닐까. 결국 ‘알쓸신잡’은 남자들의, 남자들을 위한, 남자들에 의한 방송임을 내비쳤다.
한계는 여지없이 드러났다. 출연자 네 사람 중 일부는 자신의 아집을 주입시키느라 바쁘고, 다른 이들은 “얘기를 끊지 말고 들어달라”며 하소연한다. 무게 있는 메시지를 전하려던 취지의 예능이 남자들의 학력과 지식, 그리고 술 과시의 장이 되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술 없이 제정신으로는 속 깊은 대화가 불가능한 한국 사회 남자들의 자화상 같아서 말이다.
술과 좋은 스펙을 지닌 남자들이 있어야 인문학을 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한 직장에서 수십년간 근무한 근로자가 느끼는 삶의 철학, 가정을 지키며 살림을 책임진 주부의 경제학. 사람들의 신발만 바라보는 구두수선집 사장의 직업관도 얼마든지 인문학으로 발전할 수 있다. 수준 높은 시청자들에게 술 마시고 얼굴이 벌개져 내뱉는 실없는 농담식의 잡학다식은 필요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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