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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는 이곳저곳 옮겨 다니고 병원은 감염에 무방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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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는 이곳저곳 옮겨 다니고 병원은 감염에 무방비

입력
2015.06.29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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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5에 외래환자 年 1000만명 몰려, 상급 대형병원에 경증환자들 북새통

병원 전전 의료쇼핑족도 쏠림 부추겨… 전문가 "의사에 단순 진료 거부권을"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환자가 이틀째 발생하지 않은 9일 오후 서울 강동구 강동성심병원 임시진료소에서 의료진이 장갑 등 개인 보호구를 벗고 있다. 연합뉴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환자가 이틀째 발생하지 않은 9일 오후 서울 강동구 강동성심병원 임시진료소에서 의료진이 장갑 등 개인 보호구를 벗고 있다. 연합뉴스

의료전문가들은 이번 메르스 사태가 우리 사회에 만연된 의료쇼핑과 이른바 ‘빅5’ 상급종합병원 쏠림 현상을 개선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한다.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서울대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성모병원 등 5개 병원에만 매년 1,000만명이 넘는 외래환자가 몰리는 비상식적인 의료 문화에 메스를 대지 않으면 언제든지 메르스와 같은 대규모 감염사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메르스 확산 주범으로 지목된 ‘한국형 간병문화’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중증질환 치료에 집중해야 할 이들 상급종합병원에 외래 환자가 북새통을 이루는 것은 의료전달체계가 사실상 붕괴됐기 때문이다.

현행 의료전달체계 분류 기준에 따르면 30병상 미만의 동네의원은 주로 경증 외래환자를, 30병상 이상 병원과 100병상 이상 종합병원은 입원환자를,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상급종합병원은 중증질환 등 난이도가 높은 환자들을 담당한다.

그런데 상급종합병원은 인터넷 등으로 진료예약이 가능하고, 호텔처럼 화려하고 깨끗한 환경에 서비스도 상대적으로 좋아 외래 환자들이 몰린다. 정부는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해 1,2차 의료기관에서 발급한 진료의뢰서를 제출해야 상급종합병원(3차 의료기관)에서 건강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했지만 효과는 거의 없다. 진료의뢰서를 제출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외래진료비 차이는 10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수원에 거주하고 있는 K할머니(69)는 두 달에 한번씩 고혈압 약을 처방받기 위해 서울의 대형병원 외래를 찾는다. 원래 가까운 지역 병원을 다녔던 K할머니는 2008년 이 병원에서 황달수술을 받은 이후 ‘단골’이 됐다. 그는 “시설이 훌륭하고, 의사 선생님도 마음에 든다”며 “동네 의원에서도 똑같은 고혈압 약을 받을 수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 병원에서 약을 타면 약발이 잘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환자들의 ‘의료쇼핑’도 문제다. 환자 한 명이 병원 여러 곳을 옮겨 다니는 의료쇼핑족들을 의사들은 ‘상진이 엄마ㆍ할머니’(진상 환자를 뜻하는 말)라 부른다. 이런 환자들은 흔하다.

평소 허리가 좋지 않았던 조모(43)씨는 서울에서 소문난 척추관절병원이 미덥지 않아 결국 ‘빅5’병원 정형외과 외래를 모두 섭렵했다. 그가 이들 병원을 돌며 보낸 시간만 5개월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어느 병원에서 치료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수술 받기를 꺼렸던 그는 결국 수술 없이 디스크를 치료한다는 유명 한방병원을 선택했다.

의료쇼핑은 개인 선택의 자유라는 시각도 있지만 다른 환자들에게 피해를 주기도 한다. 모 대학 종합병원 종양내과의 A교수는 60대 여성 환자가 최근 3년간 수많은 병원을 돌며 진료받은 각종 의료기록을 건네 받고, 이를 살펴보는 데만 30분이 넘게 걸렸다. “지금까지 치료를 잘 받으셨고, 경과도 좋다”고 말하자 이 환자는 “그 얘기 듣기 위해 서울에서 이름난 병원을 다 돌아다녔다. 이제 좀 안심이 된다”며 바로 일어섰다. 진료가 아닌 몸 상태의 확인을 받기 위해 30분 넘게 외래에서 진을 친 이 환자 때문에 이날 다른 환자 중 일부는 예약이 밀려 진료를 받지 못했다.

의료인들은 이런 환자들을 줄이기 위해서는 상급종합병원의 외래진료비 본인부담금 인상과 함께 타 병원 환자의 단순 진료의뢰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의사들에게 부여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동완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교수는 “3차 의료기관 외래진료비를 인상해 경증환자들이 1,2차 의료기관에서 치료받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다”며 “자신을 치료하는 의사를 불신해 병원을 전전하는 환자로 인해 정작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이 피해를 입고 있어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인들의 경우 상급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받게 해야 자식들이 도리를 다한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도 이런 병원 문화에 한 몫한다. 올해 3월 서울의 한 대형병원 장례식장에서 부친상을 치른 A씨는 “비록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큰 병원에서 수술을 시켜드려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지인들도 “지병으로 10년 넘게 고생하셨는데, 시설 좋은 병원에서 치료 받다 가셨으니 고인도 만족해 하셨을 것”이라고 위로했다.

주웅 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 교수는 “지방에 있는 부모가 병에 걸렸을 때 서울 유명병원에 모시지 못하면 불효자가 되는 것이 현실”이라고 씁쓸해 했다. 수도권 대형병원 쏠림 현상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보는 것은 지역 의료기관들이다. 암, 뇌혈관 질환자 외에 경증 질환자들도 서울로 몰리기 때문이다. 조치흠 계명대 동산의료원 암센터장은 “서울에서 수술하고 돌아온 환자들 뒤치다꺼리하는 것이 지방 병원의 현실”이라고 개탄했다.

지역대학병원의 한 교수는 “‘빅5’ 병원 중 일부는 생명보험회사, 건강검진센터 등과 협약을 체결해 지방 환자까지 유치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수익을 위해 지방 환자까지 쓸어가는 대형병원도 자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후진국형 간병문화도 시급히 개선돼야 한다. 29일 현재 메르스에 감염된 환자 182명 중 64명(35%)이 환자 가족ㆍ보호자, 병문안 온 방문객이었다. 가족을 대신해 환자를 간호하는 간병인이 감염된 경우도 8명(4%)이나 됐다. 박종훈 고려대안암병원 정형외과 교수는 “환자와 간병인, 방문객이 뒤섞여 있는 병원 문화에서 병원 내 감염을 막겠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한국형 간병문화의 개선을 위해서는 간호인력 확충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2010년 기준 간호사 1인당 담당 병상(환자) 수는 4.5병상으로, 미국(0.71), 영국(0.56), 일본(2.0)보다 월등히 높다. 간호사 1명이 돌보는 환자 수는 상급종합병원이 8.1명, 종합병원이 14.7명이었고 일반병원은 35.4명이나 된다. 한미정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사무처장은 “간호사가 부족해 환자의 가족에게 간호를 맡기게 된다”며 “환자 발생시 온 가족이 희생해야 하는 구조가 한국형 간병문화를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김치중 의학전문기자 cjkim@hankookilbo.com

정지용기자 cdragon2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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