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 피하려 상임위 단계서 쏟아내
“최순실 예산 삭감되자 오히려 기승”
‘최순실 국정농단’ 파문으로 그 어느 때보다 검증 시간이 부족했던 예산전쟁의 승자는 이번에도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다. 국정농단 사태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 문제로 온 나라가 떠들썩한 상황에서도, 국회의원들의 ‘쪽지 본능’은 여지 없이 발휘됐다. 국회 안에서 영향력이 높을수록, 선수(選數)가 많을수록, 당에서 차지한 권한이 클수록, 상임위원회에서 한 자리라도 맡은 의원일수록 자기 지역구 예산을 챙기는데 더 혈안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쪽지 예산’의 성과는 부끄러워하고 감추기는커녕 치적으로 적극 홍보됐다.
4일 국회와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올해 의원들이 예산 심의과정에서 증액을 요청한 사업은 4,000건이 넘고 금액으로는 40조원에 달한다. 의원 개개인이 지역구 사정 때문에 늘려달라고 요청한 예산이 1년 나라 예산의 10분의 1에 달하는 것이다.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의원 증액요청 사업 규모가 15조~20조원이었던 것과 비교해 2배 이상으로 폭증했다.
의원들의 ‘예산 민원’이 폭증한 원인 중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청탁금지법(김영란법)의 영향이다. 김영란법 실시에 따라 정식 편성ㆍ심의과정을 거치지 않은 예산청탁이 모두 불법으로 간주되자, 의원들이 상임위원회 단계에서부터 증액 요구를 한꺼번에 쏟아낸 것이다. 이와 관련 국회가 쪽지예산을 없애겠다며 올해 처음으로 예산안조정소위를 공개하겠다고 했지만, 이 약속은 수포로 돌아갔다. 국회가 갑자기 여야 3당 간사로 구성된 증액심사소소위원회에 위임하고 비공개로 전환하면서 예산 심사가 다시 밀실심사로 바뀌었고, 이 과정에서 실세로 분류되는 의원들의 지역구 선심성 예산이 대거 반영됐다.
물론 김영란법 실시와 함께 쪽지예산이 실제 예산으로 확정되는 양상은 과거와는 상당히 달라졌다. 지난해까지 쪽지 예산은 예산결산특별위원회(예결위)의 예산안 계수 조정 과정에서 지역구 의원들이 지역구 예산 요청을 쪽지에 적어 계수조정소위에 들어간 동료 의원들에게 건네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예산당국 관계자 등의 말을 종합하면, 올해는 지역구 예산을 어떻게든 상임위원회와 예결위 심사에 한 줄 걸쳐 놓고 비공개 증액심사를 통해 이를 대폭 증액시키는 방식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예전처럼 막무가내로 쪽지를 들이미는 경우도 여전했다. 기재부 관계자는 “예년보단 적었지만, 올해도 어김없이 쪽지를 들이미는 사람이 있었다”고 말했다.
최순실 사태가 되레 예산 민원을 쉽게 만들었다는 분석도 있다. 올해 국회는 심의 과정에서 최순실 관련 예산 1,800억원 가량을 깎았는데, 깎인 예산 대부분을 지역구 민원 사업으로 채웠다. “깎인 최순실 예산으로 ‘쪽지 파티’를 벌였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한 중앙부처 관계자는 “최순실 사태 때문에 어수선한 상황이어서, 올해는 의원들이 예산민원을 들이밀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실은 역시 이름 있는 의원들이 주로 챙겨갔다. 새누리당에서는 이정현(전남 순천) 대표 지역구의 경우 순천 유소년ㆍ청소년 다목적 수영장 건립(50억원), 전남 거점고등학교 공공형 골프실습시설 확보(10억원) 등에 약 100억원이 증액됐다. 정진석(충남 공주ㆍ부여ㆍ청양) 원내대표 역시 공주박물관 수장고 건립(7억6,000만원이 증액) 사업을 따 갔고, 김광림(경북 안동) 정책위의장의 지역구에서도 성선현 문화단지 조성(27억원), 도촌지구 용수개발(14억원) 등 50억원 가량의 예산이 늘었다.
야당도 다르지 않았다. 대선후보군으로 분류되는 김부겸(대구 수성갑)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지역구에선 대구 남천 정비사업 예산 20억원과 수성구 매호천 정비사업 예산 14억원이 증액됐다. 박지원(전남 목포)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의 지역구에선 광주~목포 호남고속철도 사업에서 655억원이 증액됐다.
심지어 의원들은 이런 지역구 예산 확보가 “내 덕”이라며 홍보 경쟁에 나설 정도다. 백승주(경북 구미갑) 새누리당 의원은 “KTX 구미역 정차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연구용역비 3억원을 챙겼다”고 보도자료를 냈고, 김병욱(성남 분당을) 민주당 의원은 남한산성박물관 건립 국비 15억원 확보를 내세웠다. 박지원 위원장 역시 트위터를 통해 목포 지역 예산 증액을 적극 홍보했다.
전문가들은 아무리 공식 절차를 거친 사업이라 해도 이번처럼 심사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깜깜이로 반영된 예산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고 말한다. 윤영진 계명대 교수는 “증액 심사를 또다시 비공개로 하는 등 공개되지 않은 곳에서 예산심사가 이뤄지다 보니 매번 쪽지예산 지적이 나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세종=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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