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덕을 무대로
항일 의병장 신돌석과 친일 기업인 문명기 인생 갈려
그 후손들 삶도 극명한 대비
일제가 식민지 건설의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한 1878년, 경북 영덕을 무대로 엇갈린 일생을 살게 될 두 남자가 태어났다. 한 사람은 평민출신으로 항일 의병장을 지낸 신돌석(~1908), 또 한 사람은 일제치하 대표적 친일 기업인이던 문명기(~1968)다. 혼돈의 시대 애국과 매국이라는 정반대의 길을 택했던 두 사람의 운명은 당대에 끝나지 않았다. 이들의 후손은 광복 70년을 맞는 오늘날에도 극명히 대비되는 삶을 살고 있다.
12일 경북 청송군 진보면에서 신돌석 장군의 손자 재식(64)씨를 만났다. 그는 66㎡(20평) 남짓한 집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60여년을 살면서 그가 소유한 유일한 재산이다. 신씨와 아내는 이곳에서 노모(80)를 모시고 있다.
신씨는 “집이 누추하다”면서도 “그래도 이 집에서 부모님과 6남매까지 8명이 살았다”고 말했다. 가족의 바람막이가 되어준 집 한 채가 내심 고마운 듯한 말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신씨는 평범한 마을, 안락한 집에서 살지 못했다. 경북 영양군 석보면의 한 산속에서 태어나 세 살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1906년 의병을 일으킨 신돌석 장군이 300여명 남짓한 병력으로 울진, 삼척, 강릉 등에서 일본 주둔군을 격파하고 이듬해 영해 경무서(지역경찰의 사무를 맡아보던 관청)를 습격하자 일제는 영덕군 축산면에 있던 그의 집과 논ㆍ밭 등 전 재산을 몰수했다. 인근에 모여 살던 일가 친척들도 조사와 감시를 받아야 했다. 집과 남편을 잃고 생계가 막힌 신 장군의 부인 한재여(1878~1952)는 결국 1920년대 후반 아들 둘을 데리고 산속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궜다. 화전 생활은 광복 이후까지 30여년 간 계속됐다.
광복이 찾아와도 신씨 일가는 고향인 영덕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신 장군 때문에 피해를 입은 친척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신씨는 “결국 청송군 진보면으로 내려와 아버지(신병욱)가 고추, 콩 등을 떼다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악착같이 돈을 모아 아내와 자식 6남매를 건사했다. 신 장군의 항일운동을 입증하기 위해 5년여 간 동분서주한 끝에 1962년 어렵사리 건국훈장 대통령장도 받았다. 하지만 간신히 생활이 안정돼 갈 무렵 일이 터졌다. 신씨는 “아버지가 조부의 비석을 세우는 등 기념사업을 준비했는데 추진위원장이 사업비를 몽땅 들고 도망갔다”며 “50년 전 돈으로 7,000여만원의 빚더미에 올라 앉았다”고 말했다.
신돌석 손자 신재식씨, 빠듯한 살림에 대학 진학 포기 입대
문명기 손자 문태준씨, 재력 바탕으로 엘리트 코스 밟아 교수·장관 등 고위직 두루 섭렵
당시 안동의 중학교에 입학하려던 신씨는 돈 한 푼 없이 전세방을 전전하는 가족들을 보며 결국 진보면에 남아 중ㆍ고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군대를 갔다. 다행히 제대 후 유공자 혜택을 받아 농협에 취직했고 32년간 직장생활을 하다 7년 전 정년퇴직 했다. 그는 “그래도 두 아들을 안동에서 공부시켰고, 조부 고향인 축산면에 기념관이 생기고 생가도 복원돼 고마운 일”이라며 웃었다.
신 장군의 후손들이 굴곡진 삶에 허덕일 때 문명기 일가는 승승장구했다. 평안남도 안주 출신인 문명기는 유년 시절 영덕으로 이주해 1907년 지품면에 제지공장을 차렸고 금광을 인수해 큰 돈을 벌었다. 1935년 금광을 처분한 돈 12만원 중 10만원을 일본 육ㆍ해군 비행기 구입비용으로 헌납해 비행기에 ‘문명기호’라는 이름이 붙었다. 자본력을 등에 업고 1941년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기도 했다.
광복 후에도 문명기는 막대한 자본력과 인맥을 활용해 자녀와 손주들을 지원했다. 종손 문태준(87)은 1950년 서울대 의과대를 졸업한 뒤 미국과 일본에 유학을 다녀와 연세대 교수가 됐다. 정통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는 정ㆍ관계로 발길을 넓혔다. 4선 국회의원, 대한의사협회 회장, 세계의사협회 회장,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장관 등 고위직도 두루 섭렵했다.
이날 찾은 영덕군 강구면 문명기의 묘 옆에는 노산 이은상의 글귀가 새겨진 비석이 자리잡았다. 비문에는 “국도 개통과 동해안 축항 공사에 정력 했으며 (중략) 장손 의학박사 국회의원 태준을 비롯하여 50여 명의 제제(濟濟) 명사들이라 이로써 덕을 쌓은 집에는 자손이 복을 받는다는 옛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겠다”고 쓰여 있었다. 일제치하 문명기의 친일 행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문명기의 친일전력이 묵인되고 있는 이유는 뭘까. 강구면에서 만난 박모(84)씨는 “군사정권 시절 손자(문태준)가 국회의원이었는데 누가 친일행적을 문제 삼으려 했겠느냐”며 “아직도 문씨 일가를 두려워해 다들 말을 아낀다”고 했다. 또 다른 주민 김모(79ㆍ여)씨는 “문씨 일가로부터 알게 모르게 혜택을 받은 사람들도 많아 자의반 타의반 그들의 행적을 들추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반세기 전 숨진 친일파의 영향력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얘기다.
제지공장이 있던 지품면에도 문명기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후손들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비석을 세운 것이라고 주장했다. 주민 요청으로 문명기 장례가 군민장으로 치러졌다는 말도 들렸다. 하지만 대다수 마을 사람들의 기억은 이와 조금 달랐다. 지품면에서 만난 김원형(77) 씨는 “갑진년(1964년)에 마을 유지 4명을 발기인으로 문명기 기념비를 세운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당시엔 문씨 일가의 위세가 대단해서 기념비 설립을 거북하게 생각했던 주민들도 대놓고 반대하기가 힘들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기념비에는 누군가에 의해 두 동강이 났다가 다시 붙여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다만 김씨는 “물론 문명기가 친일 의혹을 받고는 있으나 금광 덕분에 마을 사람들이 먹고 살만해졌고 그 자손들이 마을발전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한 것도 사실”이라고 문씨 일가를 평가했다.
문명기에 대한 지역사회의 평가가 분분했기 때문인지 일부 후손은 ‘문명기 미화작업’에 나서기도 했다. 문명기가 환갑에 얻은 딸 문모(77)씨는 2000년대 중반 아버지의 기념사업을 추진하러 영덕을 방문했다가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문씨는 안동사범대를 졸업한 뒤 대구에서 터를 잡고 초등학교 교장, 정부ㆍ여성단체 간부 등 지역의 유력인사로 살아 왔다. 그는 2006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금광을 인수하겠다던 일본사람이 계약금을 주지 않아)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문제 해결을 위해) 금으로 된 명함을 들고 일본 총독을 만나러 갔다” “(비행기 헌납은) 일본인을 최대한 이용해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우리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라는 등 아버지의 과거를 왜곡 포장하는데 앞장섰다. 손자 태준씨는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강구면 소재 땅 1만1,207㎡(3,390평)가 2009년 친일재산국가귀속 결정이 나자 이를 취소해달라는 취지로 서울행정법원과 서울고법에 소송을 냈다가 패소하기도 했다.
현재 태준씨는 서울 용산구에, 딸 문씨는 대구에 생존해 있다. 태준씨는 현역에서 물러난 뒤 서울 용산구에 있는 228㎡(69평)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중구의 일가 소유 건물을 관리하고 있고, 딸 문씨는 한 재단법인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태준씨는 건강을 이유로 인터뷰를 고사했다. 문씨는 아버지의 애국주의자 면모를 담지 않으면 인터뷰에 응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지인을 통해 전해 왔다. 기자는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
영덕ㆍ청송=글ㆍ사진 박주희기자 jxp938@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