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감정과 무관한 조건 안 따져요"

입력
2014.10.23 04:40
0 0

"학력·경제력·스펙… 둘 사이에 장애물 안 돼"

연인과 오해 푸는 법 등 경험자들 정보 공유, 블로그·웹툰 인기

#노란색 가로등 불빛이 청계천변 산책로 위에 은은히 내려앉았다. 나보다 정확히 한 발자국 앞선 그를 뒤따라 걸었다. 3달 동안 짝사랑 하던 이 남자. 이성에겐 관심도 없던 26년차 모태솔로인 내 가슴에 처음으로 사랑의 불을 지핀 그. 운명 같은 이 남자는 캐나다 국적의 흑인이다. 말없이 그를 뒤따라 걷기만 했는데도 볼이 발그래 달아올랐다. 제법 서늘해진 날씨가 무색할 만큼. 20분쯤 걸었을까. 앞서 걷던 그가 돌아서 나를 잡아 세웠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치는 날 두고 그가 약간은 어눌하지만 나지막하게 한마디를 건넸다. “내 여자친구가 되어줄래?” 순간, 시간은 분명 멈췄다. 대답 없이 눈물만 흘리는 날, 그가 넓은 품 가득 꼬옥 안았다. 2014년 9월24일. 시계는 오후 11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연애를 시작한 이혜인(26ㆍ여)씨에게 세상은 요즘 핑크빛, 그 자체다. 매일 같이 보던 하늘, 별다를 것 없던 풍경의 세상도 사랑에 빠진 사람에겐 전혀 달라 보일 수 있음을 새삼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그녀에게 새 세상을 만들어준 이는 캐나다에서 온 제임스(23)다. 혜인씨와 제임스 커플은 ‘닭살 커플’로 통하고 있다. 대학 친구들은 더는 혜인씨에게 모태솔로계의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두 사람은 혜인씨가 캐나다에서 교환학생으로 온 제임스의 한국어 선생님을 하면서 처음 인연을 맺었다. 제임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주던 친구가 사정상 두 달 정도 자리를 비우면서 혜인씨가 그 자리를 대신 한 것이 인연이 됐다. 혜인씨는 제임스에게 한국어를, 제임스는 혜인씨에게 영어를 가르면서, 두 사람은 여느 사람보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눴다. 이후 두 사람은 어느덧 속 깊은 고민도 얘기하는 ‘친구’가 됐고, 사랑에 빠졌다. 혜인씨는 “그는 내가 만난 그 어떤 남자보다도 진실한 사람”이라고 웃어 보였다.

2030세대에게 외국인과의 ‘국제연애’는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국제 연애를 두고 한결같이 “외국인이라서 사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귀는 사람이 외국인일 뿐이다”고 말한다.

한 때 외국인과 연애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던 시절이 있었다. 삐딱한 시선은 여성들에게 특히 가혹했다. 한국 남성이 외국 여성과 사귀면 "능력 있네"라고 말해도, 한국 여성이 외국 남성과 사귀면 "쟤 뭐지?"하는 반응을 보였다. 연애 파트너가 흑인 남성일 경우, 수군거림은 더 심했다.

하지만 이젠 그런 분위기도 제법 누그러졌다. 아직 편견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분명 개방사회, 다문화사회로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서로 다른 국적의 외국인 남성 10여명이 패널로 등장해 토론을 벌이는 TV프로그램 등이 인기를 끌면서 외국인에 대한 거리감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미국 국적의 남자친구를 둔 대학생 이은주(24ㆍ여)씨는 국제연애에 대해 “국제 연애도 똑같은 연애기 때문에 특별할 것도 이상할 것도 전혀 없다”며 “사실 '국제’라는 말도 붙일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서울 이태원의 한 식당에서 지금의 미군 남자친구 다니엘(26ㆍ미국ㆍ가명)씨를 처음 만난 은주씨는 “평소 미군들 중에 한국 여성을 성적으로 유혹하려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를 자주 들어 경계했지만 다니엘은 달랐다. 그는 오히려 한국 여성들이 갖고 있는 미군에 대한 편견을 알고 내게 호감이 있어도 적극적으로 다가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은주씨는 “오랜 기간 내게 한결같은 관심을 보이는 그를 신뢰하게 됐다. 생각이 나와 다른 부분이 있어도 ‘네 생각은 그렇구나’하며 먼저 이해하려 노력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남자친구가 전역하는 대로 결혼한 뒤, 미국으로 함께 건너갈 계획이다.

대학생 강현수(24)씨는 여러 외국인과 교제를 해보았던 ‘국제연애파’다. 현수씨는 “친구가 소개시켜주거나 해외 SNS를 이용해 주로 외국인과 만날 수 있었다”며 “락 페스티벌 등 축제에서 만나 교제를 했던 경험도 있다”고 말했다. 현수씨는 외국인들과의 교제로 우리나라를 더 사랑하게 됐다고 말한다. 그는 “연애를 하는 외국인이 우리나라의 문화와 명소 등에 감명받고 소중히 여기는 모습을 보면서 내 나라에 대한 없던 자부심도 생기더라”고 말했다. 현수씨는 “연애 상대방이 외국인이라고 해서 국제연애를 색안경 끼고 보지 않았으면 한다”며 “국제연애든 일반연애든 사랑의 감정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2012년 12월 결혼한 최세희(왼쪽)씨와 인도 국적의 암리쉬 안틸씨. 최씨는 연애와 신혼생활 이야기를 블로그에 소개하고 있다. 최세희씨 제공
2012년 12월 결혼한 최세희(왼쪽)씨와 인도 국적의 암리쉬 안틸씨. 최씨는 연애와 신혼생활 이야기를 블로그에 소개하고 있다. 최세희씨 제공

최근 2030세대들의 관심을 반영하듯, 국제연애 유경험자들의 블로그와 웹툰도 인기를 끌고 있다. 유명 포털사이트에는 수십여명의 블로거들이 저마다 자신의 국제연애를 소개하고 외국인 여성, 남성과의 연애 경험과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많은 누리꾼들은 이들 블로거에게 자신의 외국인 연인과 생기는 오해를 푸는 법을 상담하기도 한다.

1년 3개월의 열애 후 2012년 12월 인도 국적의 남편과 결혼, 자신의 연애와 신혼생활을 블로그에 소개하고 있는 최세희(29)씨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일반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외국인과의 연애에는 우리나라 사람과는 불가능한 장점이 있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국제 연애에 가장 좋은 점으로 외국인들에게는 남녀 역할에 대해 고정관념이 없다는 점을 들었다. 가령 우리나라 커플의 경우 남자보다 여자가 스펙이 더 좋거나 더 많은 돈을 버는 등의 감정과 무관한 조건들이 두 사람의 관계에 장애를 만든다는 것. 세희씨는 “우리나라 남성들 중에는 상대적으로 우월한 위치에서 여성을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은데 이는 커플 모두에게 큰 부담이 된다. 두 사람의 사랑만으로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는 유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희씨는 “국제 연애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나와 다른 문화의 사람을 만나고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사라졌다는 것”이라며 “나와 다른 이들의 얘기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 됐다”고 말했다.

김관진기자 spirit@hk.co.kr

이상경인턴기자(경희대 사학과 4)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