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숙여서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으세요.”
이영표(39) KBS 해설위원이 2005~08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에서 활약하던 시절 이야기다. 아스널 원정을 마치고 선수단 버스에 올라탄 이 위원은 팀 매니저의 갑작스런 지시에 어리둥절했지만 곧 이유를 깨달았다. 잠시 뒤 ‘파파팍’ ‘펑’ 소리와 함께 버스 유리창으로 맥주병과 돌이 날아들었다. 아스널 홈 구장인 에미리츠 스타디움부터 토트넘 지역까지 거리는 약 4km. 이 중 절반은 아스널, 나머지 절반은 토트넘 지역인데 토트넘 선수들을 태운 버스가 아스널 지역을 벗어날 때까지 원정 팬들의 ‘테러’가 이어졌다. 반대의 경우도 똑같다. 아스널 선수들도 원정을 왔을 때는 토트넘 팬들의 돌팔매질을 감수해야 한다. 북런던 지역을 연고로 하는 토트넘과 아스널이 얼마나 앙숙인 지 한 눈에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토트넘과 아스널의 라이벌전 이른바 ‘북런던 더비’다. 북런던 더비의 역사는 100년이 넘었다. 1913년 남부 런던에 연고지를 두었던 아스널이 북부 런던으로 이전해오면서 시작됐다. 2001년 여름, 토트넘의 유스 출신으로 주장이었던 솔 캠벨(42)이 아스널로 이적하면서 두 팀의 경쟁 의식은 더욱 불붙었다. 토트넘 팬들은 캠벨을 아직도 ‘유다’라 고 부르며 저주를 퍼붓는다. 북런던 더비는 늘 낮에 열린다. 이 위원은 “밤에 경기를 했다가 자칫 폭동이라도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팬들이 이렇게 극성이니 직접 경기를 뛰는 선수들도 비장할 수 밖에 없다. 이 위원에 따르면 토트넘 구단은 아스널과 경기가 다가오면 끊임 없이 과거의 북런던 더비 영상을 보여주면서 분위기를 고취시킨다고 한다.
올 시즌 마지막 북런던 더비가 열린다.
두 팀은 5일(한국시간) 오후 9시45분 토트넘의 홈구장 화이트 하트레인에서 정규리그 29라운드 맞대결을 펼친다. 올 시즌 상대전적에서는 아스널이 앞선다. 작년 9월 캐피털 원 컵에서는 아스널이 2-1로 이겼고 그 해 11월 정규리그에서는 1-1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이번 북런던더비는 토트넘과 아스널이 나란히 우승권에 위치하고 있어 더욱 관심을 모은다.
아스널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첼시, 맨체스터 시티와 함께 늘 ‘빅4 클럽’대접을 받았지만 토트넘은 우승후보로 분류될 정도 레벨은 아니다. 1992년 프리미어리그 창설 이후 토트넘이 아스널 보다 높은 순위로 시즌을 마친 건 딱 두 번(1992~93시즌 토트넘 8위 아스널 10위, 1994~95시즌 토트넘 7위 아스널 12위)뿐이다. 하지만 올 시즌은 반대다. 2위 토트넘이 15승9무4패(승점 54)로 3위 아스널(15승6무7패ㆍ승점 51)에 앞서 있다. 1위 레스터시티(16승9무3패ㆍ승점 57)와 격차도 크지 않다. 만약 토트넘이 아스널을 잡으면 선두 탈환도 가능하다. 반면 패배는 치명적이다. 우승은 멀어지고 심리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아스널도 마찬가지다. 우승의 향방이 걸린 길목에서 벌어지는 북런던 더비라 영국 언론들도 ‘세기의 빅매치’라며 흥행을 열을 올리고 있다.
국내 팬들은 토트넘에서 뛰고 있는 국가대표 공격수 손흥민(24)의 선발 출전도 기대하고 있다.
손흥민은 작년 여름 토트넘으로 이적한 뒤 두 차례 북런던 더비에 나섰지만 모두 후반 교체 출전이었다. 공격포인트도 아직 없다. 최근 주전 경쟁에서 다소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 북런던 더비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반전의 계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윤태석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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