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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공시족의 나라] “공무원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천막”

입력
2017.03.3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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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ㆍ스펙ㆍ성별 등 차별 없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기회의 장

개인 삶 즐기며 정년 보장 매력

회사 그만두고 공시 유턴도 급증

29만명 응시해 98%가 불합격

1만1655개 직업 중 단 1개에

대졸자 절반이 ‘몰빵’하는 꼴

낙방땐 대안없어 다시 공시촌으로

삼선 슬리퍼에 트레이닝 바지는 공시족의 교복과도 같다. 24일 서울 노량진 공시촌에 뿌려진 학원 전단지 더미를 한 공시족이 밟고 서 있다. 류효진기자
삼선 슬리퍼에 트레이닝 바지는 공시족의 교복과도 같다. 24일 서울 노량진 공시촌에 뿌려진 학원 전단지 더미를 한 공시족이 밟고 서 있다. 류효진기자

“일할 때 차별이 진짜 심했어요. 직책만 대리, 팀장이지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본사 계열이 아니라 하청업체다 보니 월급이 턱없이 적더라고요. 공무원만큼 공평하게 채용되고 승진되는 게 없겠다 싶었어요.”

지난해 7월 부산에서 서울 노량진으로 올라온 한모(28ㆍ여)씨는 7, 9급 선거행정직을 동시 준비 중이다. 취업 경험이 있는 그는 사람 대하는 서비스업이 자신에게 잘 맞는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사회적 인식이 안 좋아” 공무원이 되기로 했다. 일반 기업 채용의 공정성에 의구심도 있었다. 한씨는 “일반 기업은 나보다 스펙이 낮은데도 채용되는 애들도 있고 안 보이는 연줄 같은 것도 작용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공무원은 필기만 붙고 면접만 잘 보면 채용이 되잖아요. 사기업은 준비해도 확실하지 않은 것 같아 더 확실한 공무원을 준비하게 됐어요.”

“공무원 되면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한국일보가 24일 입수한 서울시청년활동지원센터와 대학내일20대연구소, 청년유니온의 공동 연구보고서 ‘공시 준비 청년층 현황 및 특성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청년들이 ‘공시행(行)’을 선택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기회로서 거의 유일하고 ▦차별, 성희롱, 경직된 분위기, 불필요한 야근 및 노동강도 등 불합리한 기업문화를 피할 수 있으며 ▦일정한 삶의 질 유지와 최소한의 사회적 인정이 가능한 신분이라는 점. 지난해 11월 공시족 627명 대상 설문조사와 올 2월 취업 유경험자와 무경험자 각각 8명을 심층 인터뷰한 결과다.

공시족들은 최소한의 삶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 고용안정성이 필수라고 생각했다. 취업 경험이 없는 공시족의 48.4%, 취업 경험이 있는 공시족의 55.5%가 직업 선택의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고용안정성을 꼽았다. ‘개인생활 및 여가의 보장’(32.2%, 29.1%), ‘미래 성장 가능성’(20.4%, 18.3%)이 그 뒤를 이었다. 보고서는 “결혼, 출산, 자기계발, 취미생활 등 개인의 삶을 챙기면서 정년을 보장받을 가능성을 공시족들이 가장 중시한다”고 분석했다.

“올라갈 길이 없잖아요. 더 높은 곳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유지하는 것도 힘드니까 안정적인 길이라도 택하자는 거죠.”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이모(21ㆍ여)씨는 연구진과의 인터뷰에서 “최소한 사람답게라도 인정 받는 길이 공무원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공무원이 삶의 질과 사회적 인정을 보장 받을 길이라는 인식은 상대적으로 학력이 낮은 집단(2년제 대학 졸업 이하)일수록 강했다. 학력이 낮을수록 직업 선택의 폭이 좁은 탓이다. 서울 소재 2년제 대학에 재학하며 9급 일반행정직을 준비 중인 김모(21ㆍ여)씨는 “지금 시대에서 살아가려면 그나마 공무원이 낫지 않을까. 다들 대피소를 찾으러 가는 거다. 안주하는 느낌이지만 그게 가장 안전한 천막이 되어주니까”라고 말했다.

기회의 차별 없지만… 실패하면 대안 없어

국가직 7, 9급 공무원 임용인원은 1995년 1,909명에서 2004년 2,266명, 2016년 5,103명으로 20년간 약 3,200명이나 늘어났다. 하지만 응시자 수는 기하급수로 증가했다. 1995년 9만8,361명이었던 국가직 공무원 지원자는 2004년 22만5,506명, 2016년 28만8,565명으로 19만명이나 증가했다. 불평등한 현실에 대한 유일한 탈출구로 공무원을 선택한 공시족들이 급증하면서 경쟁률은 나날이 높아지고, 합격자들의 학력도 점점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합격을 보장할 수 없는 데 대한 불안감은 없을까. “많죠. 많지만 그건 다 마찬가지니까.” 한씨는 “몇 년 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다른 쪽으로 전환해 취업하는 게 어렵다는 걸 잘 안다”고 했다. 공무원 시험 과목은 행정학, 행정법, 국어, 영어, 사회, 과학 등으로 일반 취업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간만 날리는 거예요. 하지만 한번 발을 들이면 마약 같아서 될 때까지 하게 돼요.”

겨우 1.8%만 공무원 신분증을 갖게 되고 나머지 98.2%는 선택의 기로에 서지만, 불합격할 경우 구체적 대안을 갖고 있다는 공시족은 19.3%에 불과했다. 준비 기간이 길어질수록 투자 비용은 늘어나고 대안을 찾을 가능성은 낮아지는 악순환에 빠진다. 결국 공시족들은 취업시장으로 나가지 못한 채 또 다시 ‘노량진 공시촌’을 찾을 수밖에 없는 쳇바퀴의 굴레 속으로 빠져든다.

24일 서울 노량진 공시촌의 모습. 류효진 기자
24일 서울 노량진 공시촌의 모습. 류효진 기자

그래도 공무원… 늦깎이 진로유턴족도

이미 취직을 했다가 퇴사하고 다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2016년 9급 공무원 합격자 중 30세 이상 합격자는 29.6%로, 이들 중 상당수가 ‘진로유턴족’으로 추정된다. 7급 일반행정직을 준비 중인 이모(22ㆍ여)씨는 독학사로 학사학위를 받고 취업을 했다가 6개월 만에 그만뒀다. 전산입력과 배송 이관 등의 단순 작업을 하다가 ‘고령화 시대에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싶어 공시에 도전하기로 했다. “급여도 몇 십 년 되면 생각보다 괜찮고 안정적인데다 휴가도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점에 끌렸다. “회사 다니다 보니 안정성과 자기계발 시간을 중시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흥미 있는 일을 하기는 힘드니까 안정적인 일을 하면서 남은 시간에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공무원이 제일 나을 것 같았어요.”

9급 식품위생직을 준비하는 김모(28)씨도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연봉과 자기 시간”이라며 “공무원이 되면 자기시간이 보장된다”고 말했다. “공무원은 아무래도 칼퇴근이니까요. 빨간 날도 보장되고.”

자유롭게 직업 선택할 권리를

보고서는 “청년들의 진로 계획이 공무원으로 단일화되다시피 하고 있다”며 “대졸자의 절반에 달하는 청년들이 한국직업사전에 등록된 1만1,655개의 직업 중 오직 공무원이라는 직업만을 선택하려 한다는 사실은 정상으로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자유롭게 직업을 선택할 권리는 행복과 직결될 뿐 아니라 보다 건강한 미래 사회를 만드는 데 중요한 조건”이라는 지적도 이어진다.

하지만 이런 현실이 청년들 탓은 아니다. 다른 길, 삶의 다른 대안을 보여주지 못하는 왜곡된 사회가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만하다. “안타깝죠. 다양한 분야에 맞는 맞춤형 인재가 되면 좋을 텐데. 다들 노량진에 가서 공무원 준비를 하는 게 안타까운 걸 모르는 건 아니에요.”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이모(25)씨는 “갈수록 근속년수도 짧아지고, 고령화도 심해지는데 최소한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데가 공무원밖에 없다”며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이게 최선”이라고 말했다.

9급 법원직을 준비 중인 나모씨는 “취직을 하려면 중소기업은 충분히 일자리가 많다”면서도 “중소기업 다닌다고 말하면 대기업 다니는 사람보다 낮게 생각하는 게 싫었다”고 말했다. “경제 성장기부터 대기업 중심이다 보니까 하도급 문제라든지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같은 문제가 생긴 거잖아요. 이걸 완화하면 중소기업도 부가 늘고 그러면 고용창출이 되고 사람들의 인식도 변하지 않을까요?” 5월 ‘장미 대선’을 치르고 나면 사회의 획기적 구조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공무원이 안 돼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청년들이 꿈꿔볼 수 있을까.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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