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계 황태자’로 불리는 차은택(47)씨는 최근 가장 ‘핫’한 인물이다. 각종 특혜 및 인사권 개입 의혹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정부에서 추진한 문화 예술 사업을 막후에서 주무른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차씨를 둘러싼 의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불거지고 있다.
하지만 차씨가 처음부터 권력 지향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한 때는 ‘문화 대통령’ 서태지 못지 않게 콘텐츠로 대중을 사로잡았던 걸출한 크리에이터였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쏟아 부어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열정의 크리에이터 차은택
차씨는 1997년 이민규의 뮤직비디오 ‘아가씨’를 통해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데뷔했다.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그는 동국대 시각디자인과에 진학했다. 사실 그 때까지만 해도 꿈이랄 게 없었다.
올해 1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1년간 구직활동을 했다. 인테리어 기사 자격증 시험도 보고 그래픽디자인 회사에서 인턴 생활도 했다. 하지만 그가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었던 일은 영상을 다루는 일이었다. 군 제대 후 잠깐 동안 영상 프로덕션에서 아르바이트 했던 경험은 그를 영상 업계로 이끌었다.
힘든 조연출 시절을 겪으면서도 책, 음악, 영화 등을 통해 자신을 채워나갈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그러면서 혼자서 만들어 놓은 영상이 100여편에 이르렀다. 이 소식이 입소문을 통해 연예기획사까지 흘러 들어갔고, 뮤직비디오 감독 섭외 요청이 들어왔다.
이후 그는 이승환, 싸이, 이효리, 빅뱅, 브라운아이즈 등 내로라 하는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를 만들었고, 2002년 월드컵 당시 SK Speed 011의 ‘붉은 악마’시리즈와 삼성전자 애니콜 시리즈를 비롯해 화제에 오른 광고도 여러 편 만들었다. 그는 열정을 발판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드라마와 영화까지 진출했다.
그는 1등에 익숙해졌다. 앞선 인터뷰에서 그는 “2000~2007년까지 1등 소리를 듣고 살아왔다”며 “해마다 대상을 받다 보니 오만해졌고, 남의 얘기를 듣기보다 내 말만 하기를 좋아했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이 내리막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고객의 발길이 뜸해졌고, 세간에선 그의 작품이 식상하다는 평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내리막길이 겁났다. 은둔형 외톨이 같은 생활을 하다가 TV에서 우연히 본 지리산을 보곤 무작정 지리산으로 갔다. 산을 오르내린 뒤 그가 내린 결론은 “(산에서) 내려와 보니 올라갈 다른 산들도 있다”는 것. 그가 우선 눈독을 들인 ‘다른 산’은 국가 행사와 연관된 공연ㆍ전시 사업이었다.
미르재단 관련 의혹들
차씨가 ‘다른 산’을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한 것은 2012년 무렵이다. 같은 해 여수엑스포 한국관 연출을 맡았고, 런던올림픽 응원가 ‘코리아’를 만들었다.
2014년부터 그는 인천아시안게임 영상감독, 밀라노엑스포 한국관 총연출 등 현장 활동과 더불어 문화 정치에도 발을 담근다. 그해 대통령 소속 문화융성회 민간위원으로 위촉됐고, 다음해는 1급 고위 공무원인 민관합동 창조경제추진단장 겸 문화창조융합본부장에 임명됐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는 문화 정치인으로 성공적인 변신을 한 크리에이터로 보였다.
하지만 최근 미르ㆍK스포츠 재단 관련 폭로가 이어지면서 그의 변신에 더 큰 배경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두 재단은 박근혜 대통령의 절친한 친구인 최순실씨가 개입했고, 이 때문에 설립과 모금 과정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이중 한류 등 문화 사업을 담당하는 미르재단의 실질적인 기획자가 최씨와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차씨로 지목된 것. 차씨와 최씨의 친분에 대해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4일 라디오 인터뷰에서 “차은택씨가 최순실씨 집안의 어떤 아이를 연예계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게 인연이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차씨가 미르재단의 실질적 기획자로 지목되는 근거로는 ▦재단 설립 당시 사무실을 차씨가 대표로 있던 아프리카픽쳐스의 전 직원이 계약했다는 점 ▦재단 이사장과 이사회, 사무총장 등이 차씨의 은사 등 친분이 있는 인물들로 채워졌다는 점이 거론된다.
미르재단과 함께 대통령 해외 순방 사업을 진행한 광고기획사 ‘플레이그라운드’의 실소유주가 차씨라는 의혹도 있다. JTBC가 공개한 녹취 파일에는 2015년 3월 차씨와 친한 사이로 알려진 김홍탁 대표가 “차은택이 나를 플레이그라운드의 대표로 앉혔다” “우리 회사에 돈을 대 줄 재단이 있다”고 한 발언이 담겼다. 실제로 7개월 뒤, 미르재단이 신청서를 낸 지 하루 만에 즉각 설립 허가를 받았다. 이에 따라 차씨가 처음부터 돈줄인 미르재단과 그 재단에서 사업을 따낼 회사를 모두 기획한 것 아니냐는 의혹마저 일고 있다. 물론 이 모든 의혹에 대해 정부와 플레이그라운드, 재단 측은 부인하고 있다.
끊임 없는 ‘비선실세’ 의혹
미르재단 관련 의혹 외에도 차씨가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정황을 통해 포착된다. ▦국가 예산을 들여 개발한 국민건강체조 대신 차씨가 개입해 만든 ‘늘품체조’가 돌연 국민체조로 선정됐으며 박 대통령이 시연까지 나선 점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 홍보 기획안인 ‘국민을 향한 천번의 걸음 - 천인보’에 개입했다는 점 ▦밀라노 엑스포 한국관 총연출을 맡을 당시 갑작스럽게 차씨로 교체된 점 등 셀 수 없을 정도다. 14일 국감에선 차씨가 창조경제추진단장에 임명될 때 A4용지 한 장 분량의 추천서만으로 1급 공무원에 임명됐다며 특혜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너무 많은 의혹이 쏟아지자 이제 새누리당조차 ‘비선 실세’ 의혹을 완전히 부인하긴 어렵게 됐다. 이정현 대표마저 지난 10일 국감장에서 차씨의 대부로 통하는 송성각 한국콘텐츠진흥원장에게 “구설에 오를 빌미를 만든 책임이 있는 것 아니냐”며 질타하기도 했다.
‘다른 산’을 올랐던 크리에이터는 이제 각종 의혹의 진원지가 됐다. 청와대 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까지 폭로된 상황에서 비선 실세가 ‘문화계 황태자’로 군림하고 있다는 의혹에 국민과 문화계는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김경준기자 ultrakj75@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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