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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첫 강제수용소 ‘다하우’ 가동

입력
2016.03.22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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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3월 22일

1997년 다하우 강제수용소 담장에 세워진 추모조형물.
1997년 다하우 강제수용소 담장에 세워진 추모조형물.

나치 친위대 SS(Schutzstaffel)는 돌격대 SA(Sturmabteilung)의 하부조직 중 하나였고, SA는 편제상 군대가 아닌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당)의 준군사 조직이었다. SA는 반나치 정치인과 지식인 언론인 등 정적을 제압하는, 이를테면 정치깡패 조직이었다. 자유당 시절의 그것과 다른 점은 그들은 각목이 아닌 총을 들었고, 정식 당 직속 기구라는 거였다.

SS는 하인리히 힘러(1900~1945)가 27년 친위대장으로 임명된 뒤 독자노선을 걷기 시작했고, 33년 3월 5일 총선에서 나치당이 집권할 무렵 하인리히 룀 체제의 SA와 거의 대등한, 사실상 독립 조직이 됐다. 입단 자체가 상대적으로 자유롭던 SA와 차별화하여 아리안 순수혈통만 선발하며 질적 엘리트주의를 고집했고, 경찰 조직을 흡수하면서 수적 열세를 만회해갔다. 34년 6월 이른바 ‘장검의 밤’으로 룀을 비롯한 SA 간부들이 대거 숙청됐다. 당시 힘러는 뮌헨 경찰청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비밀경찰조직 게슈타포가 SS에 편입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대규모 강제수용소 구상도 두 조직의 충성경쟁 과정에서 힘러의 SS에 의해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전까지 나치 수용소는 마을 단위 지하실과 창고 등이 주로 활용됐다. 뮌헨 외곽, 나치 최초 강제 수용소인 다하우(Dachau) 정치범수용소가 문을 연 것은 총선 직후인 33년 3월 22일이었다.

나치 강제수용소는 크게 두 종류, 노동수용소와 절멸수용소로 나뉜다. 노동수용소는 독일 기업과 전시 군수산업에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한 시설이었고, 42년 이후 본격적으로 가동된 절멸수용소는 말 그대로 유대인 학살이라는 특수 목적을 위해 기획되고 가동된 사실상 처형시설이었다. 전자가 독일을 비롯한 점령지역 전반에 분포됐다면, 후자는 독일 바깥 주로 폴란드 지역에 집중됐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벨제크, 체움노, 소비보르, 저 악명 높은 트레블링카 수용소가 모두 폴란드 지역 내에 있었다. 물론 42년 이전 강제노동수용소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굶주림과 질병, 처형 등으로 죽어나갔고 42년 이후 절멸 수용소에서도 적지 않은 이들이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그 노동은 청소 등 일상적인 수용소 관리 업무를 빼면 주로 시신 운송 및 처리였다. 첫 집단 학살 대상은 유대인이 아니라 정신ㆍ육체 장애인이었다.

강제수용소는 1980년 한국에서도 전두환 당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에 의해, 사회정화’를 위해, ‘삼청교육대’라는 이름으로 5개월 남짓 운영됐다. 발상과 운영 방식은 나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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