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살아 있는 것은 흔적을 남긴다.”
상형문자의 탄생을 설명하는데 이보다 더 명확한 명제는 없다. 인류의 등장 이래 하늘에 떠 있는 태양, 흘러가는 물, 나무가 우거진 숲 등 실체가 있는 모든 것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흔적을 남겼다. 당연히 이 흔적들 속에는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켜켜이 쌓여있다. 하지만 모든 흔적이 다 문자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공동체 내에서 어느 정도 합의가 이뤄진 흔적만이 비로소 문자로 통용됐다. 대표적인 예가 한자의 조상격인 갑골문자다. 바꿔 말하면 갑골문자, 즉 한자를 공유한다는 것은 역사와 문화를 공유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각 지방마다 다른 언어를 쓰면서도 오랜 시간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중국의 원동력을 단일문자 시스템에서 찾는 학자들도 있다.
대만 최고의 문화비평가이자 작가인 탕누어의 책 ‘한자의 탄생’은 한자의 태동과 역사를 치밀하게 추적해 인류 문화의 유전자를 밝힌다. 문학, 역사, 고고학, 사회학 등을 한자의 탄생과정과 연결해 인류의 사유와 상상력을 추론하고, 아름답고 기이한 갑골문 도상을 유머러스한 문체로 풀어내 한자에 담긴 인문학적 진실과 중국 문화의 흐름을 해석한다.
책은 3,000년 전 상나라 시대의 갑골문을 통해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와 문화를 돌아보면서 시작한다. 저자는 갑골문에 잔인한 글자들이 특히 많이 등장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예를 들어 젓갈을 의미하는 해의 갑골문을 분석해보면 큰 절구 안에서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의 형상을 볼 수 있다. 갑골문의 윗부분에는 두 손으로 절굿공이를 잡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는 산 채로 사람을 내리쳐 육장(肉醬)을 만들고 있는 상황을 묘사한다. 갑골문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산 채로 죽임을 당하는 형벌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문자다.
버릴 기(棄)의 갑골문에는 갓 태어나 아직 피가 묻어 있는 아기를 삼태기 속에 넣어 아무렇게나 내다버리는 모습이 담겨있고, 심지어 또 다른 조형자는 갓난아기를 교살하는 장면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 갑골문 속에는 물자가 풍족하지 않아 아이를 죽이거나 내다버렸던 초기 인류사회의 풍습이 담겨있다.
책은 갑골문 시대의 흔적을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초기 갑골문부터 현재 통용되고 있는 한자로의 진화과정을 추적해 인류사회의 변화상을 좇는 것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예를 들어 야생의 포악한 동물로 묘사했던 돼지의 초기 갑골문은 거세당한 주거형 돼지를 뜻하는 축(畜)자의 원형이 됐다. 이는 다시 가축을 기르는 가정의 모습으로 진화해 집을 의미하는 가(家)가 탄생했다. 저자는 이처럼 한자의 형성과정을 통해 문명의 변천을 흥미롭게 해석한다.
책은 마지막 장에서 온전히 현대사회에 초점을 맞춘다. 저자는 문자가 사라지기도 하고 새로 생겨나기도 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문자의 유한성’을 주장한다. 카페나 공항에서 볼 수 있는 화장실 기호는 새로운 문자의 원형이 될 수도 있고, 30년 전 일본이 중국색 짙은 한자를 폐기한 것은 문자 사멸의 증거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통해 인류가 지켜야 할 유산은 문자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녹아 든 문화와 사회상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한자의 역사를 추적한 책이지만 책 곳곳에 발터 벤야민, 레프 톨스토이, 밀란 쿤데라 등 서양의 사상가와 문호들이 등장한다. 이들의 사상과 작품을 한자의 형성 과정과 교묘하게 연결해 독자에게 인문학 지식을 전달하는 솜씨가 일품이다.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